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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본색

내가 사랑한 홍콩 영화

by 예빈 예준 엄마

때는 중학교 시절, 한창 감수성이 예민하던 시기였다. 그때 내가 즐겨 보던 '여학생'이라는 잡지에는 매 달마다 《영웅본색》(A Better Tomorrow)에 대한 기사와 사진들이 도배 되다시피 실려 있었다. 총을 든 남자들, 트렌치코트에 선글라스, 담배를 문 주윤발의 모습은 마치 영화 속이 아니라 한 편의 만화처럼 느껴질 정도로 강렬했다. 하지만 그 시절, 미국에서 최신 홍콩 영화를 본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지금처럼 스트리밍도 없었고, 홍콩 영화는 VHS 테이프로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는 희귀한 보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들과 함께 드디어 《영웅본색》을 보게 되었다. 오래된 비디오 테이프 하나, 어딘가 빛바랜 표지와 잡음 섞인 자막 속에서 영화는 시작됐다. 첫 장면부터 전율이 흘렀다. 주윤발이 코트를 휘날리며 양손에 총을 들고 등장하는 모습, 그 눈빛과 걸음걸이에는 설명할 수 없는 무게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잊을 수 없는 장면. 그는 이쑤시개를 입에 물고, 거침없이 적들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어갔다. 총성과 슬로우모션이 뒤섞인 그 장면은 마치 한 편의 오페라 같았다. 그는 단지 총을 든 영웅이 아니라, 처절한 고독을 품은 전사처럼 보였다.

하지만 곧 이 영화가 단순한 액션 영화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영웅본색》은 의리와 배신, 형제애와 속죄에 대한 이야기였다. 송자호와 그의 동생 송자걸, 그리고 마크. 범죄 조직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동생을 아끼는 형, 그런 형을 부끄러워하면서도 끝내 이해하게 되는 동생, 그리고 친구를 위해 목숨을 던지는 마크의 뜨거운 우정. 모든 인물들은 자신의 방식으로 아프고, 고뇌하며, 선택하고 책임진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마크가 쓸쓸한 표정으로 말하던 대사였다. "나도 이제 웃고 싶다..." 그 말 한마디에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끝까지 친구로 남고 싶다는 그의 절절한 마음. 어린 나는 그 장면에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그 순간, 마크는 그냥 영화 속 인물이 아니라 내 마음속 어딘가에 존재하는 진짜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총격전. 붉은 피가 번지는 거리 한복판에서, 장국영이 총을 맞고 쓰러지며 아내에게 마지막 전화를 걸던 장면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피범벅이 된 채 공중전화 부스에 기대어, 그는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들고 말했다. "나야... 나야, 잘 있어..." 말끝을 흐리는 그의 목소리, 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아무런 반응 없는 정적, 그리고 눈을 감으며 흘리는 한 줄기 눈물. 그 장면은 단지 영화가 아니라, 살아 있는 비극이었다.

영화가 끝나고도 여운은 오래 남았다. 주윤발이 총을 내려놓는 마지막 장면, 장국영이 눈을 떼지 못하고 바라보던 형의 뒷모습, 그리고 배경에 흐르던 장국영의 노래 〈當年情〉(당년정). 그 모든 장면들이 하나의 시처럼 마음속에 새겨졌다.

《영웅본색》은 단순히 '멋있는 영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한 시절을 함께 했던 내 청춘의 상징이었고, 사람 사이의 신뢰와 책임, 그리고 상처를 껴안는 용기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진짜 영웅은 총을 드는 사람이 아니라, 끝까지 의리를 지키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나에게 《영웅본색》은…

그건 '세상에 맞서서라도 지켜야 할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 영화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겠다'를 처음으로 묻게 만든 거울 같은 작품이었다.

《영웅본색》은 지금도 의리, 책임, 그리고 소년 같은 마음을 꺼내주는 오래된 약속과 같다.

그리고 또 하나, 모든 여고생들의 열광하던 장국영보다 주윤발을 더 좋아하게 만든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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