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한 홍콩 영화
동생이 빌려온 비디오테이프를 아무 생각 없이 틀었다.
홍콩 르느와르 물에 빠져 무협물을 보지 않던 나에게
꽤 오랜만에 보게 된 무협물이었다.
그저, 한밤의 정적을 가르며 스쳐간 붉은 실루엣 하나,
칼날보다 날카로운 눈빛, 여인보다 고운 손짓.
영화에서 임청하는 그녀도 그도 아니었다.
동방불패는, 자신을 버리고 새로 태어난 존재였다.
강해지기 위해, 단지 무공만 익힌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스스로의 육체를 깎아냈다.
욕망을 버렸고, 신체의 경계를 넘었다.
남자였던 이름은 지워졌고,
그 자리에 태어난 건 오로지 무림의 정점에 오르기 위한,
‘동방불패’라는 존재였다.
사람들이 그를 그녀라 부르기 시작했지만,
그녀는 성별이 아닌 의지로 자신을 설명했다.
절대적인 힘은 그녀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 정점에서 그녀는 단 한 번,
사람으로서 아니 여자로서의 마음을 내어주게 된다.
영호충, 칼을 들고 다가온 남자 가볍고도 자유로운 영혼.
그는 그녀를 꿰뚫지도 않았고, 꺾지도 않았다.
다만,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느 밤, 칼끝이 서로를 겨누고 있을 때조차,
그녀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영호충은 검을 들었지만, 그녀는 심장을 그 검에 내주었다.
그녀는 그를 죽일 수 있었지만 죽이지 않았다.
그 순간, 그녀는 이미 무너진 것이었다.
검 앞에서가 아니라, 마음 앞에서.
그녀가 패한 이유는 무공이 아니라, 사랑이었다.
그녀가 더 많이 사랑했고,
그렇기에 질 수밖에 없었다.
그날 이후, 동방불패는 사라졌다.
절벽 아래로 떨어졌는지,
바람 속으로 흩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녀의 붉은 옷자락은
지금도 기억 저편 어딘가를 스치고 있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질 수밖에 없다는 걸 가르쳐준 영화다.
무림의 정점에 있었지만,
그 무엇보다 사랑 때문에 슬픔으로 쓰러졌던 한 존재.
스스로를 태우고 피어난
불꽃같은 생
검보다 강한 마음,
권력보다 뜨거운 감정,
그리고 가장 처절한 순간에 드러난 연민의 표정.
그녀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저, 전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