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3 행화탕 골목길

by Trail


네잎 클로버, 혹은 H에 대하여.


Trail은 한쪽 눈을 가늘게 모은 채 펜던트를 들여다보고 있다.

눈에 댄 루페 너머로 네잎클로버 모양의 작은 펜던트가 가까이 들어온다.


클로버의 한 잎 가운데, 얇게 파인 H모양의 자리. 그 위에 작은 다이아몬드가 얹혀 있고, 오른손의 세팅 툴이 스톤 위로 가볍게 들려 있던 발을 아주 조금 눌러 기울인다. 금이 미세하게 움직여 돌 가장자리에 닿는다.


Trail은 잠시 숨을 고르고 루페 너머로 각도를 다시 본다.


아주 조금 더.


톡.


금속이 조용히 닫히며 돌이 제자리를 잡았다.

빛이 네 장의 잎을 따라 얇게 흘러간다.


작업대 한쪽에 코팅된 네잎 클로버가 놓여 있었다. H가 두고 간 것이다.

얇고 투명했을 코팅막은 오래되어 군데군데 잔주름이 잡혀 있었다. 그 흐려진 막 아래에서 잎맥은 바싹 말라, 연한 갈색 선으로 남아 있었다. Trail은 그것을 집어 펜던트 옆에 나란히 놓았다. 바람에 자란 것과 금으로 만든 것. 같은 모양, 다른 무게.


그 여자가 이것을 맡기면서 한 말은 짧았다.


'' 이걸로 만들어주세요. H가 들어갔으면 좋겠어요. 작은 스톤으로요''


Trail은 창문 쪽을 한 번 바라봤다. 새벽이 조금씩 걷히고 있었다. 그는 펜던트를 작업대 위에 내려놓고 주전자에서 물을 따랐다. 가느다란 물줄기가 종이 필터 위로 떨어지며 천천히 스며들었다. 커피 향이 조용히 가게 안으로 번졌다. 그는 컵 위로 피어오르는 김을 잠시 바라본다.



바나나 우유와 살구꽃


탈의실이었던 자리에 테이블이 놓였고, 탕이 있던 안쪽엔 조명이 달렸다. 흰 타일 벽은 그대로였다. 바닥에 파인 수로의 흔적도.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창밖을 봤다.


반듯하게 정비된 길이었다. 경사도 달랐고 꺾이는 방향도 달랐다. 같은 자리에 있는 다른 곳. 나는 그 길을 한동안 바라봤다. 딱히 뭔가를 찾는 게 아니었다. 그냥 보고 있었다. 그때 혜수 생각이 났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다. 이 동네에 오면 가끔 그렇게 된다. 흰 타일을 보거나, 살구 향을 맡거나, 경사진 골목을 걷거나 할 때. 기억은 가끔 아무 이유 없이 찾아온다.


겨울이 완전히 빠져나가지 않은 초봄이었다. 엄마의 손에 이끌려 간 목욕탕은 들어서면서 부터 괜히 발끝만 보게 되는 곳이었다. 탈의실 바닥은 물기를 쓸어내는 밀대가 천천히 지나간 자리마다 반들거렸고, 따뜻한 공기가 낮게 고여있었다. 목욕탕 문이 열릴때마다 안쪽에서 밀려오는 수증기 냄새에는 비누향이 은은하게 났다. 양말하나 벗고 옷 단추만 계속 만지작 거리는 나는 기어코 엄마 잔소리를 듣고야 만다. 재촉하는 엄마 뒤를 따라 쭈뼛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뜨거운 김이 얼굴에 닿자 숨이 잠깐 무거워졌다. 천장에는 수증기가 맺혀 물방울이 되어 떨어졌다. 뜨겁던 말던, 얼른 탕 안으로 들어가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있었다. 창피하고 지루한 장소였다. 나는 거기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구석에 있었다.


그때 유리문이 열렸다.


같은 반 혜수였다.


나는 생각할 틈도 없이 물속으로 머리까지 밀어 넣고, 눈을 감았다. 뜨거운 물이 머리와 귀를 덮었다. 물속에서는 모든 소리가 둔하게 들린다. 잠깐 세상이 물 밖에 남겨진 것처럼.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있으면 그 애가 다른 데로 가겠지. 나는 숨을 참았다. 숨이 차오르며 가슴이 뜨거워지고 귀 안쪽이 욱신거렸다. 더 버티지 못하고 물 위로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눈을 떴다. 혜수가 바로 앞에 있었다.


"안녕."


그게 다였다. 그 애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물속으로 들어왔다.


목욕을 끝내고 나오면서 엄마가 냉장고에서 바나나우유 두 개를 꺼내며 혜수를 부르신다. 학교에서 처음 본 다음으로 다시 만난 곳이 목욕탕이었던우리는 탈의실 벤치에 나란히 앉아 노란 바나나 우유를 마셨다. 창문 넘어로 행화탕 굴뚝의 하얀연기가 천천히 올라가고 있었다.


"아까... 봤어?"


"응."


"언제부터?"


"처음부터."


혜수는 빨대를 씹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나는 창피하다는 감정이 어느 순간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대신 이상한 안도감 같은 게 왔다. 설명할 수 없는 종류의.


그날 이후 우리는 늘 붙어다녔다.


행화탕에서 내려오는 골목은 경사가 심했다.


비가 오는 날엔 빗물이 골목을 따라 흘러 내려갔고, 살구꽃이 피는 봄엔 꽃잎이 그 위에 떠 내려갔다. 행화탕, 행화점 교회, 행화 어린이집.

동네 이름들은 전부 살구꽃에서 왔다고 했다. 우리는 한참 뒤에야 그걸 알았다. 알고 나서도 별다른 기분은 들지 않았다. 그 골목은 그냥 우리가 매일 걷던 길이었다.


뭔가를 이야기하며 걸은 날도 있었고, 아무 말도 없이 걸은 날도 많았다. 아무 말이 없어도 우리는 불편하지 않았다. 그때 우리는 그게 특별한 일이라는 걸 몰랐다.


겨울엔 언덕이 미끄러웠다. 지수가 내 소매를 잡아당기거나, 내가 혜수 것을 잡았다. 특별히 약속한 게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됐다.


그런 것들이 쌓이는 방식으로, 시간이 갔다.


초등학교 졸업하던 해 겨울이었다. 이삿짐차가 골목 위로 올라오는 걸 나는 창문 너머로 봤다. 재개발. 어른들이 그 단어를 말하는 방식은 날씨 얘기처럼 단호했다. 어쩔 수 없는 것, 이미 정해진 것.


혜수가 마지막으로 올라왔을 때 손에 뭔가를 쥐고 있었다.


코팅된 네잎클로버였다.


"어디서 났어?"

"골목 담벼락에 있더라."

"언제?"

"몰라, 한 일주일쯤 됐나. 행운이래. 너 줄게."


나는 괜히 코팅막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다가, 매일 카톡하자고 했다. 혜수도 그러겠다고 했다. 우리는 둘 다 그 말이 어떤 식으로 흐려지는지 아직 몰랐다. 아직 그런 일을 겪지 못했으니까, 우리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헤어졌다.



커피를 다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밖으로 붉은 굴뚝이 여전히 보이지만, 굴뚝에선 더 이상 연기가 나지 않는다.


''잘 있을까''

혼잣말이 조용히 새어나온다.


연락처는 오래전에 바뀌었을 것이다. SNS에서 찾아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지 않았다. 굳이, 라는 말이 맞는지 모르겠다. 그냥 지금 이 자리에서, 궁금한 걸로 두고 싶었다.


어떤 만남은 흘러가는 것들 속에 있다. 강물에 살구꽃잎이 떠내려가는 것처럼, 막을 수 없는 방식으로. 그 흘러감이 그때를 지웠다는 게 아니라, 그때는 그때로 완전했다는 뜻일지 모른다. 우리가 지금은 찾을 수 없는 그 골목을 걸었다는 것, 그 바나나우유가 차갑고 달았다는 것, 그걸로 충분한 것들이 있다.


그리고, 가장자리가 들뜨고 흐려진 코팅막 안에서 갈색으로 변한 클로버도.





trail의 인스타그램

trail의 일상스레드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