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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칙칙폭폭 Aug 01. 2021

애매하게 비 내리는 날의 산책과 영화 어바웃 타임

0.5몬도의 나비효과

장마기간이다. 비가 오지 않아도, 흐린날씨만으로도 축축 쳐진다. 높은 습도로 끈적끈적하고 언제 내릴지 모르는 비로 항상 들고 다녀야 하는 우산은 짐이다. 밖을 나가지 않을 수 있다면 나가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가꾸는 텃밭으로 산책이 나가고 싶어졌다. 어쩌면 어젯밤에 먹은 음식에 대한 죄책감과 운동에 대한 강박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을지 모른다. 또, 가는 길에 새로 생긴 카페에 들러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어제 마신 술을 해장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귀찮음을 무릅쓰고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게 만들었다.


나는 다이어트 중인데 맥주를 마셔버렸다, 그것도 안주와 함께. 다이어트가 꽤나 절실한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어제도 고강도의 홈트레이닝을 한 뒤, 저녁으론 두부면을 넣은 샐러드를 먹었다. 나에게 이 패턴은 몇 주간 지속해왔기에 자연스러웠고 밤에 배가 고파져도 먹고 싶은 음식은 내일 먹겠다는 일념으로 잠들곤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뭐에 씌인 사람처럼 어젯밤엔 맥주와 체다치즈 팝콘을 준비해 영화 어바웃 타임을 틀었다.


나는 영화를 보기까지 아주 오래 걸리는 사람인데, 이 영화도 총 3번의 줄다리기 끝에 마침내 어젯밤에 보게 된 것이다. 첫 번째는 개봉 당시에 고민했고, 두 번째는 몇 년 후 가장 친한 친구가 자신의 인생영화라기에 '아, 언젠간 보고 싶긴 한데...'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좋아하는 가수가 'Il Mondo'를 불렀는데, 자신이 그동안은 이 영화를 보지 않고 불러 0.5 몬도 정도를 불렀다면 최근에 영화를 봤기에 이제는 일몬도를 부를 수 있을 것 같다는 유머가 트리거가 되었다.




영화의 화면은 아름다웠고, 내용도 기발했다. "우리 가문의 남자들은 시간여행을 할 수 있어, 네가 겪었던 경험 안에서!"라니. 그리고 그 능력을 자신의 연인, 가족, 주변 사람들을 위해서 쓰는 남자 주인공이 그렇게 대단한 능력을 가진 것치곤 마냥 영웅처럼 모든 일을 한 번에 해결하진 못하고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디테일이 허무맹랑한 이야기에 조금은 현실성을 부여하는 듯 보였다.


주인공에게 말도 안되는 대단한 능력을 부여하면서까지 이 영화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그 좋은 능력을 점점 사용하지 않게 되는 영화 후반부에 나온다고 생각한다. 주인공은 힘든 날의 시간을 되돌려 다시 한번 살며, 놓쳤던 일상의 아름다운 순간들을 볼 수 있는 여유를 발견한다. 힘들었던 날은 주변 사람,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와 고민 그리고 불안, 초조와 같은 불확실성의 감정들로 뒤섞여 주인공에게 큰 짐을 지운다. 그러나 다시 한번 살아내면서 매 상황들을 이겨낼 마음의 여유를 찾는다. 직장 상사에게 받는 스트레스에 자기 자신을 짓눌리지 않고 털어낼 수 있으며, 가게 점원을 키오스크 대하듯 하지 않고 소통하며, 지나가는 풍경의 아름다움을 깨달을 수 있도록.


어찌 보면 주인공은 그날의 결과를 미리 알고 있었으며, 그 결과 또한 나쁘지 않았기에 그럴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현실을 살며 얻는 스트레스와 불안의 대상에 대해 미리 안다하더라도 우리는 별 수 없이 꼭 지나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왕 거쳐야 한다면 마음의 여유를 갖고 그 상황에 짓눌리고 휩쓸려버리지 않고 우리를 지켜낼 수 있는 여유를 가지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주인공은 일상의 소소한 행복함을 시간여행 능력을 통해 알아차리지만, 이 영화를 보는, 시간 여행이라는 대단한 능력이 없는 우리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였는지 우산을 써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도 애매한 날씨에 우산을 들고 집을 나서도 오늘따라 핸드폰 어플에서 큐레이팅 해준 음악이 너무 좋았다. 예전에 들었을 때 별로라고 생각해서 넣지 않았던 곡도 오늘따라 날씨와 찰떡이고 가사 내용도 한 구절 한 구절이 내 마음에 들어와 재생목록에 저장했다. 우산을 쓰고 걷는 것이 화창한 날의 산책보다 내 시선을 앞으로 향하게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산의 앞부분이 끝나는 지점까지 내 시선이 확장, 보호받는 느낌이 들었다. 부딪히는 사람이 없는지, 비는 어느 방향으로 오니 우산의 각도를 어느 정도 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확인하며 평소 산책길보다 새로운 시각적 정보들이 많이 입력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걸으며 우중충한 날씨에도 공원 녹지의 색색깔 저마다 다른 초록색들이 눈에 들어왔다. 햇볕이 비추어 화창한 날은 사진 보정할 때 전체 화면에 입히는 필터를 적용하듯, 햇살의 필터로 보정되어 전체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그런데 의외로 햇살 비추는 날 뿐 아니라 흐린 날 역시 생각보다 피사체가 잘 나온다. 오히려 햇살의 필터가 벗겨져서인지 저마다의 녹색이 개성들이 더 잘 드러나는 듯하다.


산책을 하다 오늘은 이런 내용으로 글을 써야겠다 생각하며 이 부분은 사진을 찍어 첨부할까 싶은 고민도 했다. 그러나 사진은 언제나 내가 보는 풍경의 감동을 온전히 전하지 못했기에 찍지 않았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있다면, 햇살 비치는 날의 아름다움과 또 다른, 흐린 날에 녹색들이 하나하나 살아나는 풍경의 아름다움을 느끼시고 자신만의 기억 사진첩에 저장해놓으셨으면 좋겠다.




계속 여름의 장마를 만끽하며 걷는데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다. 중학교 때 수학 과외 선생님. 이름과 얼굴이 아직까지 선명하지만 연락을 계속 해온 것도 아니고 그저 한 시절의 사람. 왜 그 선생님이 떠올랐을까 생각해보면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런 날씨에 그 선생님과 함께한 추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애니메이션 관련 행사인 코믹콘을 다녀왔고 그때 그 선생님의 차를 탔는데 수동 운전 차량이었고, 좋은 음향시설을 따로 설치해두었던 것이 인상 깊었다. 생각해보면, 그 선생님이 애니메이션을 그렇게 좋아할 것 같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도 의외였다. 그리고 언젠가 그 선생님이 폴라로이드를 가져와 찍어준 것이 떠올랐다. 그 선생님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궁금하면서 그때 선생님이 단순히 나를 수학 가르치는 학생이라기보다 조금 더 친구처럼, 잘 대해준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분을 만날 수 있었음에도 감사해서 기분이 좋아졌다. 애매하게 비 내리는 날의 산책도 나쁘진 않잖아! 이것이 0.5몬도의 나비효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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