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의 손녀라 행복했어요
2021년 11월 4일,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 날은 내 동생이 두어달간 준비 해 놓은 바디프로필을 찍는 날이었고, 또한 아빠의 생신이라 저녁에는 네 명이서 오랜만에 닭 백숙을 먹기로 했었다. 나는 아빠께 미리 선물을 드렸기에 따로 쓴 카드를 준비 해 두었고, 나름 미혼으로서 쓰는 마지막 카드기에 더욱 더 심혈을 기울여서 "살면서 가장 큰 자부심은 언제나 가족이었고 엄마 아빠가 주신 사랑이었으며 나도 그만큼 좋은 가정을 꾸리고 세상을 이롭게 만드는 사람으로 살겠다" 라는 다짐을 꾹꾹 눌러적었다.
그런데 그 날 새벽,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외할아버지는 향년 92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8년 전 돌아가셨던 친할아버지의 기억처럼, 외할아버지의 기억들도 유독 몇 가지 그림들이 잔상으로 남는다.
사위들과 반주를 하시는 것을 좋아하시던 할아버지. 위스키와 미국식 조식을 좋아하시던 할아버지. 군인이셨기에 목소리도 크셔서 어렸을 때는 막연하게 무서웠던 할아버지. 루비가 박힌 누우런 금반지를 늘 끼고 계셨던 할아버지. 몸이 안 좋아지셔도 담배를 태우는 것을 제일 좋아하셨던 할아버지. 유독 살결이 부드러웠던 할아버지. 맨들맨들한 대머리가 재미있어 나는 할아버지가 더 이상 큰 목소리를 내시지 않는 연세가 되었을 무렵부터 할아버지의 보드라운 손을 잡아 드리며 동시에 개구지게 할아버지의 뒷머리를 조금씩 만져드렸다.
할아버지는 늘 나를 "공주님"이라 부르셨고, 유독 나를 예쁘고 야무지게 봐주셨다. 많은 가족들이 미국에 있기에 쓸쓸할 수 있는 매 명절이 너 덕분에 명절 같다며 본의 아니게 공을 내게 돌려주시기도 하고, 매 생신 때마다는 아니지만 내가 써서 드리는 편지를 커다란 돋보기를 쓰고 읽으시며 매우 행복 해 하셨다. 할아버지는 쓰시던 치실을 종종 테이블 위에 놔서 내게 동공지진을 선사하셨고, 외출을 하실 때마다 옷에 음식을 묻혀서 할머니로부터 한소리 들으셨다.
결혼 생각이 없던 내게 왜 결혼을 안 하냐며 한국 남자들이 눈이 삐었다며 애꿎은 남자들 탓을 했고, 내가 이직을 하거나 새로운 일을 맡을 때마다 자세히 물어보시며 결국 "기사도 딸리지 않았는데 무슨 대표냐 니가"라며 핀잔을 주시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내가 '외할아버지'라 부르는 것이 별로 좋지 않다고 하셔서 언제부턴가 나는 할아버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미국에 있는 가족들과 연락을 위해 언젠가 노인들을 위해 만들어진 스마트폰 아닌 스마트폰에 카카오톡을 다운 받으시고, 나에게 실수로 보이스톡을 몇 번 거셨다. 조금 더 길게 통화할 걸, 콜백을 할 걸 후회가 남는다. 갈 때마다 핸드폰을 어떻게 쓰는지 알려드렸지만 할아버지는 이내 카카오톡을 생활화 하시는 것을 포기해버리셨다.
할아버지는 8년 전 돌아가신 나의 친할아버지, 그러니까 그에게는 사돈이었던 분과 대포집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추억을 종종 말씀 주셨다. 두 분은 외국어와 역사, 다른 문화에 관심이 많다는 공통점이 있으셨는데 90년대에 허름한 숙대 근처 대포집에서 정장을 입은 중년 남성 둘이 프랑스어로 서로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소주잔을 기울이니 주변 사람들이 많이 구경을 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원래 문학도를 꿈꾸셨으나, 생계를 위해 조금 더 현실적인 직업을 고려 하기 위해 육군사관학교로 진학하셨고 거기서 나의 할머니의 오빠, 할아버지에게는 '처남'을 만나게 된다. 정확한 타임라인과, 군 용어도 잘 모르지만 내가 듣기로는 나의 할아버지는 2성 장군으로 예편하셨고, 할머니의 오빠, 그러니 나에게는 외삼촌 할아버지셨던 분은 4성 장군으로 예편하셨던 분이다. 함께 일을 하실 당시 외삼촌 할아버지는 우리 할아버지를 많이 좋게 보셨고, 외삼촌 할아버지는 많은 여자 동생들을 소개 시켜주시며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보라' 라고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 할아버지는 셋째였던 외할머니와 함께 가정을 꾸리시게 되었다.
슬하에 네 남매를 둔 할아버지. 우리 엄마는 셋 째였는데, 아무리 예쁜 무용과 출신의 여대생이어도 엄청 고지식했던 우리 엄마는, 또 엄마 같이 고지식한 남자들만 만난건지 교제 시작 전 교제 허락을 받으러 '당신의 아버님을 뵙고 싶다' 라는 남자분들과 호텔 커피샵에서 몇 번의 만남을 주선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난다긴다 하는 스펙을 지닌 남자들을 포함하여 만나시는 분마다 각자의 이유를 대며 (심할 땐) 호통을 치시고 만나지 못하게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어느 날, 엄마는 나의 아빠를 소개 시켜 드렸고 할아버지는 아빠에 대해 자세한 것도 아시지 못했는데도 아빠를 한참 보시더니 "허허 고놈 참 귀엽다" 라고 하셨고 그렇게 우리 엄마 아빠의 만남이 시작되어 결혼으로 이어진 후 또 다른 가족이 꾸려졌다. 꾸려가고 만들어가기 나름이지만 정말 사람의 인연이라는 것은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렇게 할아버지는 가정을 꾸리고, 또 본인의 자식들이 가정을 꾸리는 것을 보며 열심히, 누구보다 유쾌하게, 그리고 행복하게 사셨다.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은 예전의 풍채 좋은 할아버지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마른모습이었다. 오랜동안 지속되온 할머니의 병세로 할머니는 집에, 할아버지는 병원에 입원을 하셨을 때이다. 코로나19 4단계가 한참이라 병원 방문도 할 수 없을 때, 추석이라고 우리 집에 온 남자친구를 잠깐이라도 보여드리고 싶어 작은 간식을 들고 병원 뒤 아주 협소한 주차장에서 소개 시켜 드렸다. 당시 간병인 아저씨가 휠체어로 모시고 내려온 할아버지는, 그 전날 본인의 사위 얼굴은 기억을 못하셨다면서 또 나를 보고는 참 반가워하셨다. 아직은 추워지지 않은 날씨임에도, 저체온증으로 고생을 하시고 계시던 할아버지는 후리스 자켓과 수면양말로 동여매고 내려오셨다.
할아버지께 남자친구를 소개 시켜 드리니 할아버지는 본인의 이름과 비슷하다며 반가워하셨고,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시더니 "나라 참 착해. 나라 착해" 라고 하셨다. 그리고 나에게는 "나라 너는 내조 잘 해라"라고 말씀을 주셨다. 나는 그게 나에게 할아버지가 남겨주신 마지막 유언이 될 줄 몰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11월 4일, 상복을 입고 장례를 치뤘다. 조부상이라 개개인으로 연락하여 알리지도 않았지만 멀리서 찾아온 손님도 감사했고, 명복을 빈다며 연락을 주는 사람들, 조의금을 보내주는 사람들 모두 너무 감사했다. 2시간이 넘는 거리를 한밤 중에 달려온 남자친구와 함께 와주시고 다독여주셔서 정말 큰 위로가 되어주신 나의 예비 시부모님께도 정말 정말 감사한 마음이었다. 조선일보에 부고를 올리라는 이모의 첫 태스크에 허둥지둥 할 때 연락을 했던 예전 회사 상사분이 신문사 사회부 연락처까지 알아내 어떻게 하는지 차근차근 알려주셔서 무사히 임무를 제 시간안에 완수도 할 수 있었다. 그 도움이 없었다면 그 일을 제대로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할아버지가 가신 것도 슬프지만 나에게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옆에서 그동안 열심히 모셨던 아빠와 엄마를 지켜드리는 것도 큰 임무였다. 8년 전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막연했던 것들이, 조금 더 머리가 컸다고 더욱 더 현실적인 눈으로 보이기 시작했고 장례의 절차 등을 보며 여러가지를 배웠다. 가족의 중요함, 큰 일을 치룰 때 윗 사람 혹은 큰 어른의 중요성 (장녀로서의 많은 의지가 샘솟았다), 그리고 기쁠 때보단 슬플 때 마음을 보태는 것의 고마움 같은 것. 비록 아빠를 위해 쓴 카드는 생일상에서 드리는게 아니라 상복 안주머니에 넣어드리는 것으로 대체해야 했지만, 아빠는 나의 마음을 그 어느 때보다도 잘 읽어주셨다.
입관식을 하며 할아버지의 차가운 두 뺨을 만질 때, 발인을 하며 화장터에서 엄마가 열심히 금강경을 읽으실 때, 유난히 햇볕이 쨍쨍했던 대전 현충원에 할아버지를 묻어드렸을 때의 모든 순간들이, 그 때 느낀 감정들이 매 11월에 나를 다시 방문할 것 같다. 할아버지는 지금 어디쯤이실까. 부디 49재를 잘 치르고 훨훨 더 멋진 곳으로 자유롭게 가셨으면 좋겠다.
장례 때 강인했던 모습과 달리 지금의 엄마는 온 우주가 텅 빈 기분이라며 매일을 힘들어하시지만, 분명 할아버지는 나의 엄마가 다시 힘을 내고 예전보다 더 멋지게, 할아버지가 살면서 주셨던 사랑을 자양분 삼아 더욱 엄마답게 삶을 살아낼 수 있게, 나와 내 동생을 통해서도 메시지를 전달 하시고 계실 것이다.
나는 할아버지 손녀라 참으로 행복했다. "살면서 가장 큰 자부심은 언제나 가족이었고, 나도 그만큼 좋은 가정을 꾸리겠으며 세상을 이롭게 만드는 사람으로 살겠다"는 비단 우리 아빠께만 드리는 말씀이 아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