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중기에 접어들어 준비하는 엄마의 삶
임신을 알게 된 첫 순간부터 9주 차의 기록을 읽고 많은 분들이 연락을 주셔서, 나의 임신 기간에 대해 보다 더 자세한 기록을 남기기로 결심을 했다. 다만 나는 정보력도 떨어지고, 태교일지 등을 쓰지도 않고 있는 엄마로서 대체 내가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만, 적어도 내가 겪는 변화나 했던 것들에 대해서 기록을 해놓으면 훗날 나같이 "생각보다 무심하고, 귀찮은 게 많은" 엄마들에게도 조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미혼일 때 많은 사람들은 나보고 "좋은 엄마가 될 것 같다"라고 했다. 당시 비혼주의에 가까웠던 나는 그 말조차 사실은 불편했는데, 사람들을 잘 챙기는 내 모습이 결국은 '모성애'로 연결되어 모든 여성을 잠정적 가임기 여성으로 간주하여 엄마라는 프레임을 자연스레 접목할 수밖에 없다는 그 공식이 싫었던 것 같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은 참 고마운 칭찬인데 말이다. 막상 임신을 해보니 내가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지도 미지수지만.
사실 좋은 엄마가 무언 지는 잘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나는 경험해 본 엄마가 한 명이다. 엄마는 굉장히 헌신적이며, 열심히 하는 엄마였다. 내 지난 많은 글 군데군데 담겨 있는 엄마의 흔적은, 헌신, 전념, 그리고 열정 그 모습 자체이다.
엄마로서의 나의 엄마의 모습은 '완벽'으로 기억을 한다. 매일의 청소, 심지어 매일 삶아져 있던 나의 속옷, 언제나 깔끔한 내 주변환경, 매일 달라지는 엄마의 밥상 (늘 건강한 먹거리를 찾아 엄마는 공부하셨다) 등. 저녁 시간에는 늘 엄마와 그림을 그리며 놀거나 엄마가 종이인형을 만들어주셔서 그것으로 엄마와 공주놀이를 했었고, 엄마가 매일 자기 전 읽어주는 책의 내용들은 나의 상상력과 감성을 넓혀주는데 큰 영향을 미쳤으며 (동시에 언어발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나는 돌이 조금 지나 짧은 문장을 구사하고, 두 돌이 되기 전 한글과 영어 알파벳을 떼서 당시 영재라는 기대감과 오해를? 많은 사람들에게 심어줬었다) 엄마가 매일밤 자장가로 불러주신 라나 에 로스포의 '사랑해'라는 노래는, 아직도 전주만 들려도 내게 눈물이 나는 '엄마 냄새가 가득한' 자장가 겸 향수의 노래이다. 엄마는 교감과 정서를 참으로 중요시하는 분이었고, 어쩌면 내가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는 모든 것의 근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엄마를 벗어난 엄마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나는 한 여성으로서 엄마를 돌이켜본다. 서울예고와 이화여대에서 무용을 전공한 인재, 너무나도 예뻤던 젊은 여성, 그 여성은 28살이라는 당시에는 '노처녀'라고 불리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너무나도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자마자 아이를 가지게 된다. 당시 엄마는 중학교의 무용선생님이었는데, 학교에 임신을 했다고 이야기를 할 수 없어 창문을 닫고 교무실 내에서 담배를 뻐끔뻐끔 피워대는 남선생님들 사이에서 엎드려 쪽잠을 자고, 입덧으로 먹은 것을 다 게워냈다고 한다. 당시엔 입덧약도 없어, 엄마는 스스로 만든, 엄마의 표현을 빌리자면 '허접한' 된장찌개를 먹고 (유일하게 들어가는 음식이었다고), 먹다 변기로 뛰어가서 토를 하고의 반복이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당시 내가 엄마 뱃속에 있을 시절 엄마 건강에 이상이 생겨 허벅지 위쪽에 방사선 치료도 했어야 했는데, 생사의 기로에 놓였던 나는 다행스럽게도 아무 문제 없이 잘 컸지만 안 그래도 쉽지 않은 임신 시기를 더더욱 험난하게 보낸 당시의 엄마를 돌이켜보면 마음이 너무 아프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 여겼기에, 엄마는 엄마의 삶이 그렇게 흘러가는 것을 받아들였고, 남편의 해외발령에 맞춰 본인의 커리어를 포기한다. 그리고 그녀는 전업주부가 된다. 능력이 많고, 너무나도 예뻤으며, 열정이 많은 여성은 그렇게 남편과 아이들에 맞춰서 평생의 삶을 전념하고, 20년이 조금 지나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가 설 곳은 없었다. 그녀는 그렇게 인생 중기를 멀리 떨어져 살아 잘 보지 못했던 부모의 곁으로 가서, 매일 병원을 함께 운전을 해서 가드리고 맛있는 것을 해드렸다. 그렇게 10년이 또 지났다.
엄마에 대한 글을 쓰면 쓰면서 늘 눈물이 난다. 지금도 나에게 가장 친한 친구인 엄마는 가끔 엄마의 삶을 돌이켜보며 속상해하신다. 엄마의 주변 사람들은 엄마의 헌신을 받으며 다들 자라고, 지탱하고, 두 다리로 섰는데 막상 엄마는 스스로를 위해 해준 것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엄마는 주변 사람들의 세상에 많은 기여를 해서 누구보다도 큰 일을 한 사람이고, 매일의 성실함과 헌신이 모든 곳에 등불을 밝혀주었는데, 그 사이 엄마는 더 작고 약해졌다. 내가 두 손으로 안으면 품에 쏙 들어오고도 남을 만큼. 그래도 엄마에게 말씀드리고 싶다. "엄마의 삶은 그 자체로도 너무나도 반짝였고, 엄마는 내가 보는 세상에 많은 부분을 반짝이게 해 주었다고." 그리고 각자의 엄마와 엄마의 삶이 애틋한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엄마”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소중하고 각별하며 위대하고 애틋한 존재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렇게 엄마를 떠올리면 한없이 고마우면서도 슬픈 와중, 결국 이기적이 자식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인지 내년에 아이를 낳고 친정 근처로 이사를 갈 예정이다. 사실 나의 엄마가 아니면 그 누구에게도 아이를 맡길 수 없을 것 같다. 나에게는 아마 일 년 백일 즈음에 출산 및 육아 휴직이 주어질 테고, 그 사이 아직은 온전한 "사람"이라고 인지도 되지 않는 생명체가 말을 하고 걷는 하나의 인간으로 성장을 할 텐데 그 시간 동안 내가 아이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해 보면 경이롭다가도 무섭다. 난 우리 엄마처럼 할 수 있을까? 결국 나의 답은 엄마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참 자식이란 무언지.
엄마가 임신을 했던 때와는 달리 지금은 임신을 하면 일정 시간 단축근무도 되고 (12주까지, 그리고 36주 이후 가능, 임신확인서를 산부인과로부터 받아서 회사 인사과에 제출을 하면 된다), 안전한 입덧약도 있다. 나는 이 입덧약을 매일 두 알씩 먹고 있다. 입덧약이 없으면 어떻게 생활할까 싶을 정도로, 초기에 입덧 때문에 꽤 고생을 했던 나는 나의 임신 기간 중 가장 중요한 아이템이라고 감히 말을 하고 싶다.
비록 보건소에서 임신확인서를 제출하고 엽산 및 여러 영양제와 함께 받은 임산부 배지의 효력은 미미하다만 (지하철을 타면 사라드는 인류애), 여하간 저출산 시대를 위해 국가가 이런저런 노력을 하기에 현재의 임산부들은 많은 도움과 보호를 받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임신을 하면 국민행복카드라는 것도 신청이 가능한데, 임신/출산 관련 비용을 지출하는데 100만 원의 바우처를 지원해 준다. 나는 보통 임산부 진료나, 입덧약을 처방받는데 쓰고 있다. 입덧약이 보험으로 커버되지 않는 약이기에 한 알에 1,500원 정도 해서 한 달 동안 먹으면 약 9만 원 정도 나온다. 물론 이 것도 약국마다 조금씩 상이하기에 더 비쌀 수도 있다.
여하간 다방면으로 내가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는 데 있어 편할 수 있도록 국가와 주변인들이 도움을 많이 주기에, 우리 세대는 참으로 복 받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아이를 양육하는 것에 있어서는 또 다른 이야기지만.
엄마가 되는 것을 준비하기 위해 나의 엄마 이야기를 하다가 말이 길어졌다. 좋은 엄마가 되는 것의 답은 여전히 모르겠고, 나는 그만큼 헌신하고 전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게 정답이 아니며 사람마다 모두 답이 다를 것이라는 것 역시 안다.
나의 가족을 사랑하지만, 분명 나는 내 일과 내가 하는 것에 너무나도 열정이 많은 사람이다. 내년이면 임신 말기인데 나는 벌써 책을 내고, 자격증을 딸 생각에 바쁘다. 태교일지는 못써도, 하고 싶은 공부는 매일 한다. 아이의 초음파 사진이 수첩에 꽂혀있기만 하다. 난 벌써 나쁜 엄마인가. 나는 살림을 잘하지도 못하고, 살림을 하면 부아가 나는 스타일이라 외부 도움을 받고 있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 그 수많은 아이 빨래는 어떻게 해야 될지 생각하면 벌써 아득하다.
심지어 오늘 아침에는 남편과 살짝 다퉜는데, 다다음주에 아이의 성별을 밝히는 '젠더리빌파티'를 하고 싶다는 남편의 의지를, 나의 귀차니즘과 "어설프게 하려면 안 하는 게 나아"라는 못된 말로 꺾어버려 남편은 속이 상해 방에서 나가 혼자 축구를 거실에서 보고 있는 상태이다. 아, 난 좋은 엄마는커녕 항상 다정하고 나를 조금이라도 더 기쁘게 해주려고 하는 남편에게 잘 부응하는 아내도 못 되는 것 같다.
임신도 출산도 처음인지라 나만의 좋은 엄마의 정의를 못 내렸지만, 나는 멋진 여성과 좋은 엄마의 정체성을 잘 양립하고 싶다. 그 과정이 쉽진 않겠지만 나는 나의 아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건강한 가치관을 가지고 세상을 이롭게 하는데 기여를 하는 좋은 사회구성원이 될 수 있게 양육을 하고 싶다. 적어도 이런 사람으로 키우기 위해 좋은 배움의 기회를 열어주고 책을 함께 읽어주는 노력등은 할 수 있겠지. 지금은 이렇게 모든 게 아득하고 불분명하다가도, 사람 일은 한 치 앞도 몰라 막상 아이를 출산하고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극성엄마가 될지도 모른다. 맘카페 등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 입김이나 잣대에 휘둘려 FOMO의 삶을 살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면서도, "애가 아프기 시작하면 맘카페를 가입할 수밖에 없다"라고 한 지인의 말처럼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가입을 할지도 모르겠지.
"좋은 엄마"란 확실히 무언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나는 나의 엄마가 나에게 한 것의 반정도는 해보고 싶다. 그렇게 하다 보면 나만의 "좋은 엄마"의 의미를 찾아갈 수 있겠지. 이렇게 엉성하고 미숙한 엄마라도, 좋은 엄마가 될 수 있는 자질은 있겠지. 그런 용기를 가질 수 있게끔 도와주는 주변 사람들의 축하와 격려에도 문득 감사한 아침이다. 임신 소식을 조금씩 알리기 시작했을 때 지인들이 보내준 축하로 이 글을 마쳐본다. 덕분에 나는 입덧도 나아졌고, 건강한 음식을 먹고 좋은 크림과 오일을 바르며 엄마가 될 준비를 잘하고 있어요.
여담이지만 이 글을 다 쓰고 나니 거실에 나가서 혼자 축구를 보던 남편이 방에 들어와 나를 꼭 안아주었다. "젠더리빌 파티는 그냥 안 할래~" 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