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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수 Nov 03. 2023

<나의 트랜지션 일기> 15장: 패싱(passing)

여자로 보여지다

[15장: 패싱(passing)]



그렇게 라섹, 안면거상 및 쌍수, 음성여성화 수술 총 이렇게 세 종류의 수술을 받고서 또 약간의 시간이 흘러갔다. 머리는 1년 가까이 열심히 기른탓에 어깨 정도까진 내려오는 상태였다. 일반적인 남자들 중에서는 잘 없는 머리길이였다. 나는 그때까지는 ‘남자 옷’을 입고 남자화장실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미 그 이전에 원피스 입고 돌아다니다가 온갖 모욕적 시선을 받은적이 있었기에 당분간은 ‘여자 옷’을 시도할 엄두가 안났었기 때문이다. 세 가지 수술을 마치고서 이미 회사에서도 내 정체성을 다 알고 있었고, 화장실도 여자화장실을 쓰라고 해줬다. 하지만 조심스러웠다. 또 내가 ‘남자’로 보여서, ‘왜 여장했느냐’ 라는 소리를 듣는다던지, 혹은 여자화장실을 갔다가 신고를 당한다던지 하는 일을 겪을까봐. 그래서 한동안은 계속 남자화장실을 썼었다. 물론 화장실을 들어갈때마다 내가 ‘남자’라는 것을 강제로 확인당하는 기분에 마음이 괴로웠다.      


아주 예전에, 트랜스젠더에 대해 ‘하리수’ 밖에 잘 몰랐을 때 트랜스젠더에 대해 보았던 기사가 떠올랐다. 트랜스젠더의 화장실 문제를 다룬 기사였다. 자신이 정체화한 성별의 화장실을 사용하지 못함으로 인한 고통 때문에 트랜스젠더는 외출했을 때 공중화장실을 최대한 안 가려고 물도 잘 안 마신다고, 소변을 참느라 방광염에 걸리는 경우도 많다는 이야기를 기사로 접했었다.

아 그런데 그게 내 얘기가 됐구나. 나 역시도 남자화장실 쓰는게 뭣같아서, 최대한 덜 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했다.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에서 제작한 '물 마실 권리' 컵.


그러던 어느 날, 남자화장실 세면대 앞에 있었는데, 아저씨 두 명이 들어오더니 나를 보고

웬 아가씨가 여기있지?


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 너무 놀래서 급히 화장실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등 뒤로 아저씨들이 자기들끼리 뭐라뭐라 하면서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 상황이 조금 무섭기도 하였고, 한편으로는 내가 여자로 보였다는 사실이 기쁘기도 하였다. ‘여자로 보였다는 것’. 트랜스젠더들이 쓰는 용어로 이것을 바로 ‘패싱(passing)’ 이라고 한다. 여자화장실을 출입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면 여성으로 보였다는 것이고, 이것을 우리는 ‘여성으로 패싱되었다’라고 한다. 우리가 국가와 병원으로부터 지정받은 성별, 신분증상의 성별이 무엇이든간에 결국에 겉으로 보여지는 성별로 일상생활을 하고 있다는걸 드러내는 단어이기도 하다.     

아무튼 나는 이제 여성으로 패싱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에 조금은 안도가 되었다. 처음보는 사람들이 다 내 내면의 정체성을 아는것도 아니고, 나의 머리길이를 보고 여성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보기로 하였다. 집에는 ‘남자옷’ 밖에 없었으므로 ‘여자옷’을 사서 입고 다녀보기고 마음먹었다. 사회적으로 여성으로 살고있는 친구에게 쇼핑 동행을 부탁하였다. 여성옷을 사려면 여성코너를 가야 했고, 여성코너에서 여성옷을 사려고 하는 행위가 가능하려면 이것 역시 ‘여성 패싱’이 필요했다. 머리는 조금 길렀긴 했지만 당시 쇼핑을 나선 나의 복장은 누가봐도 남성복이었다. 친구와 같이 여성복을 보고 있으니 옷가게 점원이 와서 말을 건다. "어느 분이 입으시게요?" 친구는 나를 가리키며 "이 친구가 입을거에요" 라고 했다. 그러자 가게 점원분이 순간 나를 이상한 시선으로 훑어봤다. 그 순간의 정적. 분위기. 어찌나 등골이 싸늘하던지. 친구가 그 분위기를 감지하고 ”여자애에요~ 옷이 없어서 그래요“ 라고 덧붙여주었다.

그래서 어물쩡 넘어가긴 했는데 조금 찝찝해하는 느낌이었고, 나 역시도 쇼핑하는 내내 마음을 졸였다. 친구가 잘 골라준 덕분에 어찌어찌 원하는 옷을 잘 고를 수 있었다.        


그렇게 옷을 사고, 주저하던 시간을 보낸 후에, 처음으로 회사에 치마를 입고 출근했다. 이미 커밍아웃도 다 해놨던 터라 다들 아무렇지 않게 여겼다.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회사에 다녔다는 것도 내가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많은 트랜스젠더들이 구직이나 직장생활에서 차별과 혐오를 겪고 있으니까.       


이 날은 공교롭게도 3월 8일 여성의 날이었다.


치마를 입었으니 이제는 그냥 여자화장실을 쓰기로 했다. 회사에서도 이제 여자화장실 쓰라고 했고, 어차피 남자화장실을 들어가면 나만 불편한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불편해할 터였다.

들어갈때마다 조마조마 했지만 다행히 한 번도 시선을 받거나 문제가 된 적은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항상 지갑에 정신과 진단서를 들고 다녔다. 신고당하게 되면 보여주려고.      

패싱되거나 패싱되지 않거나. 트랜스젠더는 항상 이 기로에 서있고 이것은 생존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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