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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수 Nov 24. 2023

<나의 트랜지션 일기> 30장: 인간관계 리셋

커밍아웃 프로젝트

[30장: 인간관계 리셋]



페미니즘을 접하고 나서부터는 ‘평범한’ 남성 친구들하고는 교류가 힘들게 되었다. 물론 설득을 시도해보기도 하였으나 세상을 보는 관점, 여성을 대하는 관점이 너무도 달랐다. 가장 친하게 지냈던 남고 동창 친구하고도 그런 이유로 연락이 끊어졌다.      

나는 기독교인이고, 7장에서도 말했듯이 대학교 때 기독교 동아리에서 활동을 했었다. 당시 성소수자 이슈로 간사,학생과 크게 싸우고 나는 마음이 많이 상한채로 졸업을 했다.   

기독교계에서는 성소수자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성소수자를 정죄하지 않고 같은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낙인과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일반 교인을 넘어서 직분이 있는 목회자라면 자신의 생업이나 진로를 이어가는 것에 큰 지장이 생기기도 한다. 교회에서는 성소수자 앨라이(지지자)도 ‘소수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튼 나는 그랬던 기억이 있기에 대학교 졸업 후 정체화까지 하고 나니까 동아리 사람들과 도저히 연락을 할 수가 없었다. 친했던 사람들이 있었지만 먼저 연락을 하기가 꺼려지고 연락이 오더라도 잘 안받으려고 했다. 하지만 동아리 활동하며 좋은 기억도 많았기에 문득문득 그립기도 했다.      

그래서 동아리 사람들 중 내가 신뢰할 수 있고 꽤 친하다고 생각했던 몇몇 사람들에게는 커밍아웃하기로 결심했다. 어떤 남자애 A는 내가 전화로 커밍아웃을 하니까, 당황해하더니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다며 전화를 끊었다. 정말로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서 일단 기다렸는데 일주일이 지나도록 연락이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내가 먼저 문자를 보냈는데 애가 처음엔 횡설수설하더니 이윽고 ‘너무 당황스러워서 그랬다’ 하고 실토했다. ‘그냥 나는 나를 찾은 것 뿐이고 나로 살고자 하는 것뿐인데 네가 왜 당황을 하냐, 지금 너의 반응은 굉장히 무례하고 불쾌하다’고 쏘아붙인 후 A랑은 연락을 끊었다.

그리고 A보다도 더 오랜시간을 함께 했고 당시 내 자취방에 놀러와 자고가기도 했을만큼 친했던 남자애 B한테도 커밍아웃을 했었는데, 크게 당황한 티를 내지 않고 담담하게 ‘형이 그렇다면 그런거죠 원하는대로 살아야죠. 저는 아무 생각 없어요’ 라고 하길래 문제가 없을줄 알았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나를 부르는 호칭이 변함이 없고, 나를 대하는 방식에서 어떤 고민이나 노력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에 B하고도 연락을 끊게 되었다.     


한편, 괜찮았던 경우도 있다. 종종 페미니즘에 대해서 같이 얘기나눴던 여자애 C한테는 내가 커밍아웃을 하자 호칭을 바로 언니로 바꿔주었다. 내가 커밍아웃한 이후에 자신이 어떤걸 알아야 하는지 조심스럽게 물어보던 남자애 D는 어차피 나랑 1살 차이였기 때문에 호칭은 그냥 서로 이름으로 부르기로 했다. C와 D는 둘다 가끔씩 안부는 묻는 사이로 남았다. 그 외에, 커밍아웃 했을시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지만 관계에서 미묘한 어색함이 돌아서 멀어진 경우도 있다.

아참, 직접 커밍아웃은 하지 않았지만 내 프로필 사진(여장셀카)을 보고 “연수 이제 여자되는거야?” 라고 카톡을 보내왔던 애도 있었다. 트랜지션에 대한 이해도를 갖고서 한 질문일 리가 없고, 이해도가 있다면 오히려 이렇게 가볍게 물어보진 못했겠지. 얘도 바로 차단을 했다.



나의 커밍아웃은 그들의 무지함과 무례함을 '아웃팅(outing)' 시켰다.


그런식으로 많은 관계들을 떠나보냈다. 이제는 나의 이전모습을 알고있는 사람은 거의 남지 않았다. 내 안전을 위해서, 나의 삶에 대해서 함부로 판단하거나 무례한 질문을 하지 않는 사람, 기본적인 예의와 인권감수성을 가진 사람들만 곁에두게 되었다. 트랜지션 이후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떠나보내면서 나에게 위협적일 수 있는 사람을 감지해내는 능력이 계발되었다. 나에 대해서 일일이 설명하거나 해명할 필요없는, 존재의 증명을 요구받지 않는, 내가 온전히 나로서 있을 수 있는 관계라는게 참 귀하다.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고 나를 소중히 여겨주는 사람들에게 감사함을 느낀다.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이야기는 커밍아웃에 대해서 무언가 착각을 하고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커밍아웃을 받았을 때 사람들이 주로 하는 반응을 정리해보면 이렇다.


“나는 ‘그런거’에 편견없다”
“나는 주위에 성소수자 친구도 있고, 열려있는 편이다”
“나한테 피해만 안 주면 된다”  
“OO하는거 보니 성소수자 아닌거 같은데”
“이해는 안 가지만 존중한다”
“(동성애자의 경우)나를 좋아하지만 않으면 된다”
“(트랜스젠더의 경우)그래서 수술은 하셨냐/언제 할거냐” 


성소수자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과 무지, 혐오를 이야기하자면 며칠 밤낮을 지새워도 부족하겠지만 내가 직/간접적으로 가장 많이 접했던 반응들은 이렇다. 사람들은 성소수자로부터 커밍아웃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함부로 평가하고 판단할 권리를 가진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커밍아웃을 하는 시간은, 사실 엄밀히 말하면 커밍아웃을 하는 사람이 커밍아웃을 받는 사람을 평가하는 자리다. 성소수자 당사자의 입장에서 충분히 곁에 두고 지낼만큼 안전하고 사려깊은 사람인지를 말이다. 

당신이 그저 당신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성소수자도 그저 자신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 뿐, 누군가의 이해나 인정을 필요로 하는게 아니다. 따라서 굳이 자신의 ‘열려 있음’을 과시할 필요도 없고, 이해하느니 마느니 할 필요도 없고, 이렇다저렇다 판단할 필요도 없다. 그저 담담하게 ‘그렇구나’ 하고 들어준 뒤 용기내어 말해준 것에 대해 고마움을 표하는 정도로 충분하고, 관계나 상황에 따라서 ‘그동안 고생했다’ 라던지 ‘(자신을 찾은것에 대해)축하한다’ 라는 말을 덧붙여주면 좋다. 나는 언젠가는 ‘커밍아웃’ 이라는 말 자체도 필요 없어지는 사회가 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어떤 성별정체성이나 성적 지향을 갖고 있든, 그저 음식 취향 정도로 서로 다름이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사회. 그런 사회가 온다면 커밍아웃이라는 단어도 굳이 안 쓰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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