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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수 Oct 17. 2023

<나의 트랜지션 일기> 2장: 대학 시절(1)

아무도 못말렸던 남성성 덕질

[2장: 대학 시절(1)]


나는 그렇게 남중-남고를 거쳐 4년제 대학에 진학했다. 그때까지도 여전히 나는 남성성 덕후였고, 남자 선배들을 쫓아다니며 그들의 남성성을 덕질했다. 학과의 어떤 형은 남성성이 가장 고도로 발달된 집단인 해병대 출신이었고, 만날때마다 끊임없이 나에게  ‘남자라면 해병대를 가야하는 이유’에 대한 특강을 해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선배는 본인의 인생 최대업적이 해병대 전역이었나보다.

덕질이라는건 실천도 따르는 법. 젊은 혈기?에 불탔던 나는 대학교 1학년 20살 여름방학, 국토대장정을 신청했다. 왜? 뭔가 힘들어보이긴 하는데 그걸 이겨내면 더 남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경상도 진해에서부터 약 3주를 걸어서 서울까지 오는 일정. 결코 만만하지 않은 강행군이었지만 당시 나는 그저 남성성에 대한 덕심만 있었을 뿐, 딱히 운동을 해두지 않았기에 그에 맞는 체력이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이쯤에서 질문. 당시의 나는 체력 이슈로 3주의 코스를 다 소화하지 못하고 중도하차를 했는데 나는 며칠 차까지 버텼을까? 한번 짐작해보시라.


10년이 지난 지금도 창피해서..조금 뻥을 치고 싶지만 성별정체성을 얘기하는 마당에 숨길건 없으니 털어놓자면 하루다. 하루. 국토대장정에서 단 하루만에 탈진해서 쓰러져서 응급실 실려갔다가 하차했다. 어우 쪽팔려.

게다가 당시 참가인원은 무려 절반이 여성이었다. 그렇게 편협한 성 고정관념과 맨박스에 갇혀있던 평범한 한국남자였던 내가 얼마나 수치스러웠겠는가. 실제로 비웃는 사람들도 좀 있었다.

그렇게 터덜터덜 패잔병처럼 집에 돌아온 뒤에도 나는 정신을 못차리고 나의 맨박스를 더욱 단단하게 포장하기로 마음먹었다. 두고보자! 체력을 왕창 길러서 더욱 강해지겠다!      


여름방학 때 당한 수모를 뒤로하고 2학기 때는 대학교 산악부에 들어갔다. 산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이번에도 같은 이유로. 그저 강인한 남자, 진정한 남자가 되고 싶다는 열망 하나만으로 말이다. 그 곳은 분위기 자체도 굉장히 마초적이고 엄격했는데, 군대처럼 선후배간 위계가 뚜렷했으며 여성(이 얼마 없긴 했지만)에게도 ‘여자 티’를 내는 것을 금기시했다. 여자라고 봐주거나 특별대우해주지는 않겠다는 것인데, 어느 정도였냐면 상호간 호칭도 누나,언니,오빠가 없고 무조건 다 ‘형’ 이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선호되지 않을 것 같은 그 산악부 특유의 문화를 나는 좋아했다.     

당시 산악부의 활동은 지금 생각해보면 단순히 취미 수준을 넘었던 것 같다. 몸이 약한 편이었던 나는 산악부의 훈련을 따라가기 위해 부지런히 운동하며 체력을 길렀다.

선배 ‘형’들이 시키는대로 돌덩이를 집어넣은 배낭을 들쳐매고서 험준한 산을 하루에 10시간을 오르락내리락 하며 여름엔 암벽등반, 겨울엔 빙벽등반을 하는 훈련들을 어찌어찌 다 견뎌냈다.

약간 애니 클리셰처럼..당시 나랑 동기였던 여자애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워낙 출중했던 터라 (힘들어하는걸 한 번도 못 봤다) 괜히 나도 더 불탔던 것 같다.

이 글 쓰면서 산악부 홈페이지 가봤는데 그 친구 여전히 산 타고 있더라. 그 때도 괴물이라고 느꼈는데 무려 10년이 지났으니 지금은 얼마나 더 강해져있을지..       



당시 동기가 썼던 산행일지 일부. 강인하면서도 꼼꼼했던 멋진 친구였다.


그러다가 내 인생에서 나름 큼지막한 사건이 하나 발생했다. 산악부에서 북한산을 갔을 때였다. 하루종일 등산하다 늦은 저녁이 되어서 텐트치고 이제 좀 쉬려나 했는데, 졸업한 OB 선배 두명이 우리가 있는 텐트로 찾아왔다. 딱봐도 4~50대 아저씨로 보였으니 서열로 치면 아주 까마득한 선배였다. 그 두 명 중 내 옆자리에 앉았던 아저씨가 화근이었다. 꼰대도 그런 꼰대가 없었다. 대화 내내 ‘라떼는’을 시전하는건 물론이고, 특히나 막내였던 나에게 계속 꼽을 줬다. 당시는 제법 추웠던 11월 날씨였는데 막내는 빡세게 굴러봐야 된다면서 내 겉옷을 벗게 만들고, 텐트의 문을 열어젖혔다. 추위에 덜덜 떨고 있는 나에게 “네 동기 여자애는 저렇게 잘하는데 넌 뭐냐, 남자가 쪽팔리지도 않냐” 면서 (하필 내가 가장 민감했던 부분을) 계속 면박을 주고 저녁밥도 아직 못 먹어 빈속인 상태인데 계속 술을 강요했다. 그 자리에 있는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까마득한 선배한테 대들수는 없는데 그렇다고 그대로 견디지는 못하겠고, 나는 화장실을 간다는 핑계로 그 텐트에서 나와서 무작정 산을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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