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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수 Oct 18. 2023

<나의 트랜지션 일기> 3장: 대학 시절(2)

덕질을 그만두다

[3장: 대학 시절(2)]


11월 밤늦은 시간이라 날씨는 꽤 추웠는데, 그 꼰대가 겉옷을 벗기는 바람에 다소 얇은 차림으로 도망치듯 산을 내려오게 되었다. 몸은 추웠는데 랜턴이 없어서 길도 잘 안보이고, 술까지 마셔서 걸음걸이도 온전치 못했다. 여러모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내려가는 길에 몇 번씩 넘어지면 그대로 누워있고 싶다는 욕구도 있었다. 아마 그대로 누워있다가 잠들었으면 지금의 난 없겠지.. 그렇게 대략 한 2시간 정도를 정신없이 내려오다가 공중화장실을 발견했고 거기 칸막이에 들어가 변기 위에 앉아서 오들오들 떨며 아침까지 기다렸다. 그때 지갑도 있고 핸드폰도 있었는데 집이나 숙박업소를 갔으면 편했겠지만 그렇게 하지않은 이유는 자존심 내지는 반항심 같은거였을 것이다. 이대로 집에가면 도망치는 거 같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하긴 싫고, 이렇게라도 함으로써 그 꼰대가 잘못을 뉘우치길 바랐다.


그런데 생각보다 일이 커졌다. 산악부 일행들은 내가 텐트로 돌아오지 않자 찾으러 다녔고, 자신들이 찾지 못하자 산악구조대에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산악구조대 또한 나를 찾지 못하니까 119에 신고가 들어갔고 동시에 부모님한테까지 연락이 가게 되었다.

공중화장실에서 버티던 나는 아침이 되어 다시 텐트로 돌아갔고 그렇게 나의 실종 소동이 마무리가 되었다. 다들 그때 얼마나 놀랐을까. 지나고 생각하면 가족들과 당시 산악부원들한테 미안한 마음 뿐이다. 딱 한 명 그 꼰대 아저씨 빼고. 끝까지 나한테 사과 한 마디 안하더라.     




겨울에 했던 설악산 빙벽등반. 여름에 하는 암벽등반보다 더 힘들다.




그 사건 이후, 겨울방학 산행을 마지막으로 나의 우당탕탕 산악부 활동이 마무리가 되었다.  

한겨울에 일주일동안 숙박하며 산행+빙벽등반을 하는 일정이었는데, 한 학기동안 산악부에서 체력이 많이 단련되었던 나였지만 그 일정만큼은 감당하지 못했다. 일주일째 되는 날에 쓰러져 국토대장정 때처럼 응급실 신세를 졌다. 그때 이후로 사실상 나의 ‘남성성 덕질기’ 는 끝났던 것 같다. 몸이 여기저기 상한채로 집에 누워있으면서 회의감과 허탈감을 많이 느꼈다.

‘내가 이렇게까지 남성성을 추구해야 되나? 내가 꼭 남자다워야 하나? 내가 가질 수 없는걸 좇으며 살아왔던게 아닐까?’ 는 생각이 들었다.

학과 형한테 주기적으로 듣던 해병대 특강도 더는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굳이 일부러 힘든곳을 갈 필요가 있나?


그렇게 나는 공식적인 남성성 덕질은 그만두기로 하였다. 산악부는 탈퇴하게 되었고, 해병대 형과도 멀어졌다. 음 그래도 군대는 가야하니 신청은 해야겠고..그냥 평범한 육군으로 다녀오기로 했다. 1학년을 마치고 어느 여름 날 입대를 하게 되어 5주간 군사훈련을 받으며 들었던 생각은, ‘와 이걸 웬만한 대한민국 성인남성들이 다 했다고?’ 였다. 하루하루가 1년처럼 느껴지는데 이 5주를 다 마치고 자대생활까지해서 2년여의 시간을 다 견뎠다니. 남자들이 새삼 대단해보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남자란 무엇일까? 내가 남자일까? 남자일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계속하여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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