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프리랜서의 일은 기다림의 연속이 아닐까 싶다.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프리랜서가 되면서 가장 크게 느낀 차이점은 기다림이라는 요소였다. 일단 수업의뢰도 번역의뢰도 어느 순간에 연락이 와서 상담이 이뤄질지 예측 불가능하다. 상담이 이뤄지고 나서 상대방이 결정을 내릴 때까지 나는 또 기다려야 한다. 하루이틀 안에 결정이 내려지는 경우도 있지만 종종 2-3주가 걸리기도 한다. 2주가 넘어가면서 이제 의뢰를 맡기지 않겠구나 하고 그 건을 잊어버릴 무렵 갑자기 연락이 오는 일도 종종 있다. 그렇게 나는 기다림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
새로운 인연
금요일 아침 메일을 체크하는데 한 저작권에이전시에서 메일이 왔다. 독일의 한 대형 출판사에서 독일어 번역자를 추천해 달라고 했다며 나에 대한 경력사항과 번역샘플을 보내달라는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매우 오랫동안 다른 한 저작권 에이전시와 협력해 일을 해왔다. 사실 친구 한 명과 동업하여 그 에이전시를 차렸었다. 나는 좋은 독일책을 찾아내고 우리나라 출판사들에 그 책들을 소개하는 일을 주로 맡았고, 그 친구는 독일 출판사들에 저작권을 의뢰하여 우리나라 출판사들에게 저작권을 중개하는 일을 맡았었다. 그렇게 중개가 성공했을 때 번역자가 필요하다고 하면 내가 번역을 맡아서 하곤 했다. 그러다가 공부와 취직이 겹치면서 나는 그 친구에게 에이전시를 넘기고 나왔다.
오랜 인연
그 사이 그 친구는 에이전시를 더욱 크고 강하게 키웠고 이제는 독일뿐 아니라 유럽 전체와 미국 책들까지 중개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소설을 해외에 파는 일도 하게 되었다. 내가 그 에이전시의 변화와 발전과정을 옆에서 꾸준히 지켜봐 왔듯이 그 친구 또한 내가 어떤 책을 번역하고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내가 다시 번역을 하고자 한다고 선언했을 때 나의 경력사항이나 번역샘플을 요구한 적이 없었다.
다시 신인
그런데 오늘 한 에이전시로부터 메일을 받고 나서 내가 정말 오랫동안 번역과 멀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다시 새롭게 시작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지금까지 나는 정말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지는 않고 있었던 것이다. 신인번역가가 된 듯 나를 어필해야 하는 이 기분이 결코 나쁘지 않다. 새로운 에이전시, 새로운 출판사, 새로운 책들에 대한 기대감이 동반되기 때문이다.
다시 기다림
새롭게 인연을 맺은 에이전시에게 서둘러 답장을 보내고 나서 수신확인 버튼을 눌러본다. 메일을 보내고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 상대방이 내 메일을 읽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제부터 얼마를 기다려야 할까 가늠해 본다. 짧다면 다음 주 초에 연락이 오겠지. 물론 그 이상이 걸릴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항상 모든 결정에는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개입되어 있기에 시간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이번 기다림은 아마도 즐거운 기다림이 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