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식이 상식이 되는 사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by 정의석

플라톤 철학에서 이데아는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물에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가 존재하지만, 그 형태는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흔히 이데아는 동굴의 비유로 설명됩니다. 플라톤은 동굴 안에, 몸이 묶여 바깥쪽을 보지 못하는 죄수가 있다고 가정합니다. 입구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게 될 경우 죄수들이 볼 수 있는 것은 그림자뿐이지요. 하지만 죄수들은 그림자를 실체라고 생각합니다. 플라톤은 이런 상황을 예로 들며 죄수들이 보는 그림자를 '현상세계' 동굴 바깥의 실체를 '이데아'라고 말합니다.


플라톤 이후 이 이데아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연구됩니다 (물론 지칭하는 이름은 조금씩 다릅니다). 비슷한 개념으로 기독교의 천국, 불교의 극락을 들 수 있습니다. 물론, 도가에는 선계가 있지요. 우리가 이들의 생각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런 이상세계를 현실에서 이룰 수 있을지 없을지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이들이 각각의 이상세계를 도출하게 된 배경을 알면 현실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지요. 그 시대 사람들의 생각이 담겨있다는 점에서 이데아는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1500년대의 영국에서도 플라톤과 비슷한 고민을 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토머스 모어이지요. 그는 왜 이상세계에 대해 고민하게 된 것일까요? 그의 생각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하나하나 알아보도록 합시다.


토머스 모어가 한 말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도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 일 것입니다. 양이 난폭해지기라도 한 것일까요? 왜 그는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말한 것일까요? 그 이유는 영국에서 진행된 인클로저(enclosure) 운동과 관련이 있습니다. 인클로저 운동은 산업혁명이 태동하는 시점에 영국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변화입니다. 수많은 농민들이 쫓겨나 빈민으로 몰락하게 된 계기를 제공한 운동이지요.


인클로저 운동의 목적은 목축업의 자본주의화를 위한 경작지 몰수였습니다. 산업혁명때 영국에서 판매용 곡물 혹은 가축을 키우기 위해 농지에 울타리를 세우자 농사를 지었던 농민들은 공장들이 많이 세워진 도시로 내몰리게 되고 도시의 하층 노동자로 일하게 된 것이 사건의 핵심이죠.


영국은 이렇게 빼앗은 토지를 양을 기르는 데 사용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양모(양털)가 매우 귀했기 때문에 생산량이 많으면 비싼 값에 팔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결국은 양모로 벌어들인 돈 때문에 많은 농민들이 죽음의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양이 직접적으로 사람을 잡아먹는 행동은 하지 않지만 양으로 인해 사람들이 죽게 된 것이지요. 이런 사태를 모어는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말로 비판한 것입니다. 이 말은 그의 작품인 '유토피아'에 기록된 것이지요.


유토피아는 그리스어의 ou(없다), topos(장소)를 조합한 말로, '어디에도 없는 장소'라는 의미입니다. 즉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사회를 일컫는 말이지요. 그가 어디에도 없는 세계를 정의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토마스 모어의 마음을 읽을 수는 없겠지만 저는 인클로저 운동으로 황폐화된 현실을 그가 비판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상세계는 어디에도 없고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비합리주의적이라는 우회적인 비판인 것이지요.


토마스 모어는 유토피아를 어떻게 묘사했을까요? 먼저 유토피아는 상상의 섬으로 총인구는 10만 명입니다. 주민들은 가족 단위로 편성됩니다. 50가구가 모여서 하나의 집단을 이루고 '시포그란트 (대표)'를 선출합니다. 이들이 모여 평의회를 이루고 '왕'을 선출하지요 (이 왕은 전제군주가 되면 퇴위를 당합니다). 유토피아에는 자폴렛이라는 용병이 있는데 전투 중에 적들과 함께 죽기 때문에 군사독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화폐가 없고, 모든 사람들은 하루 6시간 동안 노동을 해야 합니다. 집은 똑같고 자물쇠는 없으며, 타성에 젖지 않기 위해 10년에 한 번씩 이사를 해야 하죠. 필요한 물건은 시장에서 가져다 쓰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물론 이런 견해는 사람의 욕망을 제외한 순수한 형태라는 점에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동의를 구하기는 어렵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주민들이 집단을 이루어 시포그란트를 선출하게 될 경우, 일반적으로 우리들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들이 자신에게 속한 주민들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것을 빼앗아 올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똑같이 노동을 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노동을 하지 않고 편안한 삶을 누리려 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다른 누군가를 이용하려고 하기 때문이죠. 토마스 무어가 유토피아를 어디에도 없는 세계라고 말한 이유가 이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디에도 없는 세계를 우리가 알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중요한 것은 이를 통해 저자인 토마스 모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는 일입니다. 그는 유토피아를 쓰면서, 현재 영국의 비상식적인 행동이 멈추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자신이 생각한 방법이 이상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정책을 집행하는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길 바랬던 것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소극적인 방법이라고 비판을 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방식으로라도 현실에 참여하려고 했던 그의 노력이 엿보이는 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고전을 읽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는 고전을 통해 그 시대의 저자가 생각했던 현실의 문제를 다시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의 생각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확인하고 이를 현실사회에 적용시킬 수 있는 것이지요. 만약 이런 자료들이 없다면 우리는 처음부터 이 모든 것들을 새롭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대개 이런 생활양식을 유지하는 것은 동물입니다. 사람은 동물과 달리 지식을 전승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문명의 이기와 편리한 생활도 이전부터 전해진 지식의 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유토피아일까요? 유토피아는 '어디에도 없는 곳'이니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도 당연히 유토피아가 아닐 것입니다. 사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유토피아와 거리가 멉니다. 세계 곳곳에서는 자신의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해 전쟁이 발생하고 있고, 약한 자의 것을 빼앗는 강자의 횡포가 기승을 부리고 있지요. 슬프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게 발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유토피아에 가깝게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단순히 선의만을 가지고 원하는 바를 이루기는 어렵습니다. 세상이 이전과 다르게 복잡해졌을 뿐만 아니라 생각해야 될 점도 많아졌기 때문이지요. 이상적인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현실을 철저하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후 일어날 여러 가지 대안을 통해 더 나은 것들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이 절실히 요구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한 해답으로 유토피아라는 고전이 도움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글은 제가 쓴 책 중 21세기 공부법의 내용을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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