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인터뷰 2
아내에게 묻는다.
"만약 당신에게 돈과 시간이 충분해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가?"
내 질문에는 의도가 있다. 아내와 나의 공통 관심사를 찾아서, 지금이라도 함께 세상의 좋은 것들을 찾아보고, 느끼고, 즐기며 살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아내는 말한다.
"언젠가 말했었죠? 젊은 시절에는 뭔가 하고 싶은 게 많았는데, 그냥 스스로 많이 억누른 게 많았고, 결혼하고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이제는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하고 싶은 그런 거를 잊어버렸다고요. 진짜 내가 뭘 좋아했었는지도 이제 기억도 안 나고, 뭘 하고 싶은지를 모르겠네유. 이제 나는 그냥 소소한 삶, 병풍같은 삶을 추구해요."
아내는 이제 자신이 바라는 삶은 '병풍같은 삶'이라고 한다. 크게 바라지도 않는 그저 소소하고 평온한 삶을 이야기한다.
주말 아침 커피를 한 잔 앞에 둔 식탁에서의 대화는 내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 나는 장모님에 이은 장인어른 병수발로 지친 아내가 안타까워서, 이런 상황을 벗어나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다.
아내는 하고 싶은 것보다는, 그간 시댁과 남편에 대해 섭섭했던 마음과 순간들을 되살려낸다. 아내는 더 이상 기대하지 않고, 좋아지길 바라는 마음마저 없다고 한다. 이어서 아내는 지금 섬망증상으로 가끔 이상행동을 하시는 장인어른을 집에서 좀 더 모셔야 할지, 양로원과 같은 시설에 모셔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한다.
아내에게는 현실의 문제 앞에서, 앞으로의 기대나 바람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사치일까? 나는 사소하게라도 주말에 짬을 내서 나들이를 하거나, 영화나 연극을 보거나 하는 여가로 재충전도 하면, 덜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지만, 아내는 남편과 그런 생활을 하기엔 남편을 받아들이기 싫거나, 원래 집에서 있는 걸 훨씬 좋아하는 성향이라서 기대하기 어려운 듯하다.
지금 내가 아내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이런 성향의 아내를 인정해 주는 것밖에 없다. 나는 아내와 반대로 가만히 있기보다 활동적으로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 성향이다. 운동도 보는 것보다 직접 하는 것, 주말엔 집에 있기보다 기회가 된다면, 누군가를 만나거나 나들이를 하는 편이 뭔가 한 것 같고, 보람이나 즐거움을 느낀다. 최근에 나의 이런 주말 외부활동에 아내가 함께 한 적은 거의 없다.
물론 아내와 내가 젊은 시절에는 함께한 날들이 많았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아이들을 위해서 나들이나 여행을 한 적은 꽤 있었다. 어느 시기가 지나고, 친정 부모의 병간호와 아이들 교육에 매여 지내야 했던 아내는 이제 다시 그런 활동적인 여가생활을 할 의지를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지금 많이 지쳐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아내가 생활에 매여있던 시기에 내가 곁에 있어주지 못한 건 아닌가 하는 미안한 마음도 든다.
이제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 부모와 함께 하는 시간이 줄었다. 아내는 나와 여가나 취미생활을 함께 하지 않는다. 아이들과 아내에게 섭섭해했던 적이 있었다. 섭섭한 마음은 어떤 문장을 접한 후에 떨쳐버렸다. 강용수 교수가 쓴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사랑과 연애, 결혼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잠시라도 행복했다면 충분하다."
지금 섭섭해하기보다 그때 좋았던 걸로 충분해하는 편이 낫다. 또 이런 상황에 가끔 떠올리는 말이 있다. 헬런 켈러는 "행복의 한쪽 문이 닫힐 때, 다른 한쪽 문은 열린다. 하지만 우리는 그 닫힌 문만 오래 바라보느라 우리에게 열린 다른 문은 못 보곤 한다."라고 했다.
아내가 '병풍같은 삶'으로 가족을 지켜주었기에 나와 아이들은 병풍 앞에서 맘껏 자기 인생을 펼쳐놓은 건 아닐까? 그때는 그것으로 충분했고, 지금은 함께했던 닫힌 문보다 혼자서라도 가야 하는 열린 문 앞에서 아내를 기다려줘야 하는 건 아닐까.
아내는 바라는 게 없다는 말을 하면서도, 소박한 바람은 이야기했다. 장모님 산소와 가까운 어느 작은 도시, 버스정류장 부근에 살면서, 장모님 묘소도 자주 다녀오고, 다른 지역도 버스를 타고 오가면서 살았으면 한다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가족에게 든든한 배경에 되어준 아내라는 병풍이 바람에 넘어지지 않게 바람막이가 되고, 햇볕에 색이 덜 바래도록 그늘막이 되어 지켜주리라는, 말없는 다짐을 하는 것뿐이지만, 언젠가는 아내가 원하는 소소한 일상을 함께하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