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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르마이 Sep 22. 2023

기억

붙잡기와 놓기

기억이라는 코끼리를 생각해 봅니다. 기억은 거대한 분홍 코끼리입니다. 시작과 끝이 어디인지 가늠 수 없습니다.

코끼리는 시도 때도 없이 아무 때나 불현듯 찾아옵니다. 가끔은 그 무게에 짓눌려 생각이나 감정이 마비되기도 합니다.


기억이라는 코끼리를 동전처럼 가볍게 들 수는 없을까요?


"내 선택의 원칙은 항상 가장 쉽고 확실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_몽테뉴(나이 듦과 죽음에 대하여)



가끔 불현듯 떠오르는 과거가 있었습니다.


"제발 이 기억을 빨리 잊게 해 주세요."


어린 시절 어딘가에 이렇게 간절히 간구했습니다. 지금은 잊고 싶었던 기억이 무슨 내용인지 생각나지 않지만, 어릴 때 이런 말을 되뇌던 기억은 명합니다.


공부한 내용이나 즐거운 추억과 같이 기억하고 싶은 것은 빨리 지워졌습니다. 대신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는 끈질기게 나를 쫓아다니곤 했습니다.


빨리 잊고 싶은 기억은 대부분 나쁜 기억입니다. 그런 나쁜 기억은 차곡차곡 쌓여갑니다. 그러다가 불쑥불쑥 찾아옵니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기억은 대개 수치심이나 죄책감을 자극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결심합니다. '나를 괴롭히는 기억에 맞서야겠다.' 그리서 '나를 가장 불안정하게 하는 사건'을 적어 내려갔습니다. 가장 아프고 불편한 기억부터 적어 내려 갔습니다. 1, 2, 3, 4, 5... 번호를 붙이며 적었습니다. 적다 보니 61번에서 멈췄습니다.


다 잊힌 건 아니지만,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던 기억들이 대부분 잠잠해졌습니다. 그 기억들은 아주 긴 시간 동안 기억의 창고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창고가 가득 차 있으니 새로운 기억이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없었습니다.


기억의 동전이 있습니다. 한쪽 면에는 '붙잡고 있는 기억', 다른 한쪽 면에는 '내려놓은 기억'이 있습니다. 


기억은 잠재의식이 붙잡고 있습니다. 잠재의식이 붙잡고 있는 기억은 대부분 나쁜 기억입니다. 나쁜 기억을 붙잡고 있는 이유는 나쁜 기억을 만든 상황을 다시 반복하지 않으려면 그 상황을 기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억을 잊지 않고 붙잡고 있으려면 자주 떠올려야 합니다. 고통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고통스러워야 하는 아이러니입니다. 악순환입니다.


머릿속을 맴돌던 기억의 코끼리는 노트에 글로 적어 내려놓는 순간 기억의 동전이 됩니다. 코끼리는 거대하지만, 노트에 일일이 내려놓은 기억의 실체는 동전만큼 납작하고 사소합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내가 내면에 붙잡고 있던 기억을 이제는 노트가 붙잡고 있습니다. 나의 본능은 이제 내면에서 기억을 놓아줄 수 있습니다. 노트가 잘 기억해 주기 때문에 잠재의식은 잊으면 안 된다는 두려움을 떨쳐버렸습니다.  


우리는 나쁜 기억을 붙잡고 있었다는 걸 모르고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매일 기억의 코끼리를 동전으로 만드는 습관을 우리는 일기(日記)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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