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없는 영웅

수영하며 번역하며

by 백지민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도 아니고 이름이 없는 영웅. 영어로 하자면 언성 히어로(unsung hero), 즉 영웅이긴 영웅인데 그를 위해 찬양하는 노래 하나 불러주지 않는, 칭송받지 못하는 영웅을 말한다. 이런 칭호는 주로 해도 티가 나지 않는 그림자 같은 직업에 어울릴 것이다. 새벽에 일어나 열심히 쓰레기통을 비우고 도로를 쓰는 환경 미화원. 하루종일 집안을 쓸고 닦는 가정주부. 지하철이 정상적으로 굴러가게끔 차량들을 점검하는 정비공. 그런 유의 직업들은 일명 '사'라는 글자를 단 직업들—의사, 판사, 변호사, 약사, 등등—만큼은 눈에 띄지 않으니까 사람들이 굳이 그 노고를 알아주지는 않는 경우가 많다. 도로의 쓰레기는 아침이면 원래 치워져 있는 것 아닌가. 집안은 원래 깨끗한 것 아닌가. 지하철은 원래 잘 굴러가는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면 번역도 저절로 되는 것 아닌가. 요즘 번역기 돌리면 저절로 영어로 나오는데. 그렇다, 그런 유의 그림자 같은 직업에는 번역가도 존재한다.

번역가로서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제1 조건이 있다면 투명성이다. 색유리가 아니라 투명한 유리처럼, 원문을 그대로 비춰 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번역문이 분홍색이면 원문도 분홍색인 것으로 독자는 받아들이게 된다. 번역문에 무늬가 있으면 원문에도 무늬가 있는 것으로 독자는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니 최대한 나의 색과 무늬를 죽이고, 존재를 감추는 자객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원문과 독자 사이에 조용한 투명 유리로 존재하는 것이 번역가로서 바람직한 태도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투명하다고 해서 그 투명 유리가 완전히 필요가 없느냐는 또 다른 문제이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고, 번역가는 숙달될수록 투명해지지만, 기왕 그렇게 투명해졌으니까 없는 것과 동일하다고 말하면 이 고순도의 정제된 크리스탈을 연마하는 데 공을 얼마나 들였으며 이게 없으면 당장 큰일이 날 것을 모르고 하는 소리이겠다.


만일 환경 미화원이, 가정주부가, 정비공이 일제히 일에서 손을 놓아 버리면 어떻게 될까. 길거리는 하루이틀만 지나도 쓰레기로 넘쳐나서 발 디딜 자리도 없게 될 것이고—이탈리아에 여행 갔을 때 나폴리에서 마피아가 통제하는 청소 업체에서 일제히 작업을 멈추어 도시가 쓰레기더미가 된 풍경을 본 적이 있다—가정은 겹겹이 쌓인 설거지와 여기저기 쌓인 쓰레기로 난잡해져 더는 휴식과 안정의 공간이 아니게 될 것이며, 우리가 매일같이 당연하게 타던 지하철은 선로 위에서 갑자기 멈춰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면 번역가가 일제히 번역을 멈춘다면, 거기다 통역가까지 일제히 통역을 멈춘다면, 어떻게 될까. 일단은 대통령 회담에서 이루어지는 의전용 통번역도 멈춰져 회담이 불가해질 것이며, 특허가 번역되지 못하여 해외 출원의 길이 막힐 것이며, 외국어로 집필된 소설의 존재조차 알지 못할 것이며, 외국인은 외국 법원에서 보호받지 못할 것이며, 외국에서 긴급하게 들어간 병원에서 손짓 발짓을 해도 병세를 설명하지 못해 약을 제대로 처방받지 못할 것이며, 기타 등등 이런 곳까지 통번역이 필요했나 싶은 곳의 의사소통까지도 막힐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도로 위에서 정상적으로 사람들과 차량이 다니게끔, 가정이 휴식과 안정의 공간이 될 수 있게끔, 지하철이 오늘도 오차 없이 운행되게끔, 원래는 의사소통이 불가했던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교가 생기게끔, 우리 이름없는 영웅들은 그 어떤 칭송도 받지 않아도, 매일매일의 조용한 영웅들로 살아가고 있다. 그리하여 그 영웅들의 업적을 감히 함부로 폄하하는 사람들의 말들—너는 공부 열심히 해서 저런 길거리 청소하는 사람 되지 말아라, 집에 있으면 노는 거지 뭐, 번역은 뭐 영어 좀 하면 다 되는 것 아닌가, 번역가가 구글 번역보다 나을 게 뭔데 등등—은 그런 말을 뱉은 사람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인 것이지, 그것으로 우리 영웅들의 빛이 조금도 가려질 일은 없다. 비록 AI로 많은 일자리가 대체되고 있지만, 우리 일하는 사람들은, 우리 모든 떳떳한 이름없는 영웅들은, 긍지를 가지고 오늘의 일과를 시작할 자격이 있다. AI 번역에 대해 걱정을 주고받다가도, "모르겠고, 죽을 때 죽더라도 하고 싶은 거 하다가 죽자!" 하고 술잔을 기울이는 우리 번역가들을 포함하여, 묵묵히 길거리와 가정을 청소하고 차량의 나사를 조이고 오늘도 하루에 지지 않고 힘차게 출근하는 우리들은 모두, 긍지 높은 이름없는 영웅들이다.




어느덧 10화를 맞은 <번역가의 수영일지 V>는 한겨울 속 한 달간의 재정비 기간을 거쳐 따스한 봄철인 3월 19일 목요일 오전 11시에 <번역가의 수영일지 VI>로 찾아뵙겠습니다. 추운 겨울도 금방 지나 꽃이 필 것을 믿으면서, 따스한 봄날에 다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