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면 생각나는...

언어의 정원

by Erebus


특정한 계절에만 반응하는 것들이 있다. 어느 여름 비 오는 날의 부침개나 얼음 동동 띄운 시원한 미숫가루, 한 겨울의 핫초코와 같은 것들. 언어의 정원은 나에겐 여름 비를 생각나게 하는 영화이다.


비 오는 날의 공원에서 초콜릿에 맥주를 마시는 여자 유키노와 학교를 땡땡이치고 구두 스케치를 하는 남자 타카오의 만남. 어김없이 비 오는 날이면 두 사람은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만나는 것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와 서로 싸 온 도시락을 주고받으며,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두 사람. 타카오는 구두 실물화를 이유로 유키노의 발 사이즈를 재는데 이는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계기를 마련한다. 유키노는 타카오에게 이런 말을 남긴다.


천둥소리를 멀리서 들려주며 몰려오는 비구름아. 비라도 내려주렴. 그대가 여기에 더 머무르도록.


이건 만요슈(만엽집)라는 오래된 시가집에 나오는 단가로 유키노의 정체에 관한 이야기였다. 타카오는 이 단가를 듣고 한참 동안 생각하며 그녀가 자신에게 이 이야기를 해준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한다.


그러다 우연히 고전 문학 수업 중 이 단가에 대한 답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실 타카오는 비만 오면 1,2교시 정도는 제치고 공원으로 향하는 만큼, 우등생이라곤 볼 수 없는 캐릭터이다.


천둥소리를 멀리서 들려주며 비구름 몰려오지 않아도 나는 머물겠소. 그대가 여기에 더 머무른다면.


사실 유키노는 타카오가 다니는 학교의 문학을 담당하는 선생이었으나, 모종의 사건을 겪은 후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일을 그만둔 상태였다. 이때 스트레스로 인하여 미각장애가 생겼고 초콜릿과 맥주 이외에는 아무런 맛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였다. 매일 아침 출근 준비를 하지만 트라우마를 견디지 못하고 공원으로 도망쳤다. 그러다 타카오를 만나게 되었고, 타카오의 도시락을 먹으며 조금씩 마음의 안정과 미각을 회복하고 있던 중이었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된 타카오는 당장 공원으로 달려가려 하지만 공교롭게도 비는 오지 않았다. 비가 오기만을 기다린다. 그것은 유키노도 마찬가지로 어느새 고등학생인 타카오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아무도 봐주지 않던 자신을 순수하게 위로해주고 토닥여 준 존재. 유키노에게 타카오는 소중한 것이었다.


작중에서 두 남녀가 비를 계기로 만나는 장면이 많은 만큼 비 내리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신카이 마코토는 그 특유의 세심한 작화로 그 장면을 다채롭게 표현하고 있다. 길에 고인 물 웅덩이에 빗방울이 내리는 모습이나, 화분에 빗물이 고이는 것, 창가에 빗방울이 비치는 것 등등. 그야말로 비라는 것을 표현할 수 있는 모든 방식으로 표현해 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신카이 마코토의 작화는 이 작품을 기점으로 폭발했다고 할 수 있는데 단순히 그림만 보자면 이 작품은 신카이 마코토 최고의 화력을 보여준다.)


비를 보거나 빗소리를 듣는 것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만한 영화도 없었다. 비를 따라 흘러가는 두 남녀의 감정선도 좋았다. 잔잔하고 너무 전형적이라는 평도 있지만, 사실 일상이 그렇다. 일상은 언제나 잔잔하고 똑같이 흘러간다. 매일매일이 이벤트의 연속이라면 그것만큼 피곤한 일도 없을 것이다. 46분이라는 길지 않은 러닝타임 속에서 나름의 기승전결을 갖춘 영화. 언제 봐도 여름을 생각나게 만드는 비 오는 날의 수채화.


p.s. 맥주에 초콜릿 생각보다 괜찮았어요 저도 이것보고 먹기 시작했는데 맥주의 쓴 맛과 초콜릿의 단맛이 제 입맛엔 잘 맞더라고요. 물론 제가 좀 초콜릿을 좋아하긴 합니다. 이 영화는 보고 나면 그렇게 맥주가 마시고 싶어 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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