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버 더 펜스
흔히들 문학작품은 현실의 거울이라고 한다. 책은 현실을 반영해서 만들어진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미술이나 음악, 영화와 같은 다른 예술은 어떨까. 예술이란 것은 모두 다 같은 흐름이라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미술도 밀레의 이삭 줍기와 같이 당대의 현실을 그려낸 작품이 있고, 음악도 각각의 시대에 따라서 당시 사람들의 취향을 반영한 로코코와 바로크 음악이 나왔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영화도 현실을 반영한다.
인생은 힘들다. 아프다. 쉽지 않다. 현실은 안전만을 추구하게 만들지 않는다. 누구나 자신만의 아픔 하나쯤은 있다. 여기, 시라이와(오다기리 죠)와 사토시(아오이 유우) 또한 그렇다. 성실하고 상냥한 시라이와는 실업급여를 받으며 직업훈련학교의 건축과에서 목수일을 배우고 있다. 딱히 목수를 직업으로 삼을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그는 하루하루를 성실히 보내려 노력하는 타입이다.
그는 도시락을 사고 편의점에서 나오다가 우연히 남자에게 특이한 방식으로 자신의 사랑을 표현(타조가 구애할 뗴 하는 춤을 춘다.)하는 사토시를 보게 된다. 단순히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했지만 우연히 같이 일하던 동료가 데려간 술집에서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된다.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는 사토시가 나쁘지 않았던 그는, 이후 여러 차례 동료와 술집을 방문하여 그녀와의 거리를 좁혀가고 그러다가 그녀의 집에 초대되어 하룻밤을 같이 보낼 뻔한다. 그런데 집에서의 그녀의 행동이 조금 이상하다. 목욕을 하는 자신의 몸이 더럽다며 몸을 마구 문지른다. 마치 깨끗한 것에 대해 강박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서로의 호감이 결실을 맺으려는 때에 사소한 말다툼으로 인하여 서로의 감정이 어그러진다. 사토시는 시라이와도 결국 자신이 만나봤던 남자와 똑같은 남자라고 생각하고 시라이와 역시 그녀에 대한 감정이 식어버린다.
사토시는 자신을 그 자체만으로 온전히 사랑해주는 남자를 원했지만 시라이와를 만나기 전까지 그런 남자를 만나지 못했다.(물론 서로 알아가는 과정의 오해는 좀 있다.) 문제는 그 모든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그 결과로 자신을 더 옭아매서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목욕을 하며 보여주는 그녀의 강박증이 그 증거다. 그리고 망가질 대로 망가진 내면은 그녀의 활동적이고 외향적으로 보이는 겉모습과는 대조적이다.
한편, 성실하고 누구에게나 다정한 시라이와 역시 사실은 가정에 무심하여 결국 이혼을 한 아픈 과거가 있다. 자신은 행복해질 수 없다는 듯이 이혼 후 외부와의 모든 관계를 끊고 혼자 살아가던 그에게 다가온 사토시는 잔잔한 호수에 물결을 만드는 작은 돌멩이 같은 존재였다. 사실은 자신이 남들이 생각해주는 만큼 사람 좋은 사람이 아니란 것을.
두 사람에게는 모두 각자의 울타리가 있다. 그런데 그 울타리는 혼자의 힘으로는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거대한 울타리이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두 사람은 서로를 만났다는 것이다. 자신의 아픔을 이해해주고 있는 그대로를 바라봐 줄 수 있는 사람을.
서로의 아픔에 대해 알아가고 이해해가며 그 둘은 자신의 울타리를 마침내 뛰어넘는다. 극 중 시라이와의 직업학교에서 진행하는 야구 경기에 사토시를 초대하는데 타자로 나온 시라이와가 경쾌한 소리와 함께 홈런을 치며 두 사람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울타리(한계)를 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녀의 구애도 마침내 결실을 맺었고, 자신을 고독하게 만든 그도 탈출구를 찾았다. 글의 처음에 현실이라는 키워드를 쓴 것은 이 영화 제목 자체가 우리네 현실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었다. 각자의 사정을 가진 두 남녀가 만나 힘든 현실을 이겨낸다. 참으로 멋진 영화였다.
단순히 킬링타임으로 즐기는 영화도 나름의 재미가 있지만, 이렇게 현실을 반영하는 영화가 주는 여운이 참 좋다. 인생은 모름지기 함께할 때 더 즐거운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