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매의 여름밤, 우리의 여름날.

그리고 모두의 여름밤.

by Erebus


오랜만에 아주 마음에 드는 영화를 만났다. 잔잔하게 흘러가면서도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은 영화를 좋아한다.

무슨 이야기인고하니, 사실 우리가 있는 현실은 극적이지 않다. 대체로 흐르는 강물처럼 조용히 흘러갈 뿐. 그러나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전혀 그렇지 않은 삶을 사는 경우가 많다. 남자 주인공은 잘 생기고 능력 있는 데다 심지어 돈까지 많고 여자 주인공은 외모는 기본이거니와 혹 배경이 안 좋다 하더라도 그걸 충분히 커버하고도 남을 남자와 만나 결국엔 결혼한다.


이 흔하디 흔한 클리셰! but, 누구나 빠져들법한 선남선녀의 이야기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어디에나 있다. 이런 자극적이고 인위적인 소재는 마치 조미료를 더한 음식처럼 순간적으로 혹하게 만들고, 자극의 강도를 높여만 간다.


그러다 어느 순간 평양냉면이나 콩국수 같이 담담하면서도 대단한 맛은 아니지만 꾸준하게 생각나는 그런 음식이 당길 때가 있다. <남매의 여름날>은 딱 그런 음식 같은 영화다.


사춘기 소녀이자 영화의 전체적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화자인 옥주와 마냥 천진난만하지만 누나 껌딱지인 남동생 동주, 경제적으로 여유 있어 보이진 않지만 두 아이에 대한 사랑만은 진심인 아빠와 아빠의 동생이자 조카바보인 고모. 그리고 이 영화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할아버지까지. 마치 대한민국의 어느 하늘 아래 정말로 있을법한 이 가족들에게 빠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에서 묵어본 경험이 있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소재와 소품들을 경험할 수 있다. 할아버지 방 벽면을 꽉 채운 붙박이 자개장이라거나, 할아버지 댁 필수품인 낡고 오래되었지만 아직은 쌩쌩한 현역인 선풍기와 라디오, 네모난 텔레비전, 때 묻은 재봉틀, 괜스레 반가운 모기장까지. 할아버지 댁이라고 하면 보편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수많은 소품들의 향연만 봐도 나는 이미 저 멀리 추억여행을 떠나 있었다.


영화의 내용 또한 현실과 다르지 않아서, 할아버지는 연세에 맞게 어딘가 몸이 아프시고 남매의 아버지인 아빠는 이혼을 하고 아이들을 혼자 키운다. 아이들의 고모이자 아빠의 동생인 혈육은 뭔지 모를 사연이 있어 보인다. 시종일관인 분은 할아버지밖에 없다. 갈등 요소가 있기는 하지만 절대 크게 나오진 않고 흘러가는 스토리에 딱 맞는 양념장 같은 느낌이다. (스토리를 설명하는 것보단 직접 보는 편이 더 좋으리라.)


코로나19로 인해 점점 단일화되고 모이기 힘든 시점인 것도 이 영화를 보며 느꼈던 부러운 분위기를 한몫했다. 그래 우리 저렇게 모여서 수박도 먹고 음식도 먹던 때가 있었지 하고 조금 씁쓸한 기분을 느끼게 하기도 했다.


신중현과 김추자의 <미련>은 또 어떻고.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그만한 배경음악은 또 없으리라 생각할 것이리라.


혹자는 한국에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나타났다고도 했다. 그렇다. 현실성을 살리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이 딱 맞는 느낌이다. 무엇보다 감독의 말을 첨언하자면 이렇다.


이 자료의 출처는 cgv의 영화 소개 페이지이다.


영화의 장르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영화가 가진 힘을 현실을 되돌아보게 만들면서 동시에 지금의 삶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이건 영화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닌 모든 예술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윤단비 감독의 다음 작품이 참으로 기대가 되게 만드는 <남매의 여름밤>. 아직 못 보신 분들이 있다면 꼭 추천하고 싶을 만큼의 영화다. 아마 올해 최고의 한국영화가 될 수도 있다는 데에 그 믿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옥주 역으로 나오는 최정운 배우의 연기가 인상 깊었다. 이 작품을 통해 처음 본 신예 배우인데 더 많은 작품에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날씨의 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