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바르셀로나
라 센트랄 델 라발 La Central del Raval
람블라스 거리를 사이에 두고 왼쪽은 고딕 지구 오른쪽은 라발지구가 위치해 있다. 람블라스 거리를 조금 내려오면 카탈루냐 모더니즘 스타일로 꾸며진 낡은 약국이 보이는데 그 골목으로 들어간다.
관광객들이 가득한 람블라스 거리를 잠시 피할 수 있는 작은 광장을 지나 쭉 직진한다. 엘리자베스 거리에 닿으면 거리와 같은 이름의 작은 식당이 있다. 엘리자베스 레스토랑을 지나 골목으로 더 들어가면 엘리자베스 거리 6번지에 삐걱대는 마루를 갖고 있는 보석 같은 서점 '라 센트랄 델 라발'이 있다.
백 년이 훌쩍 넘은 건물들 사이에서 크게 눈에 띄지는 않지만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확실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라 센트랄 델 라발'을 발견할 수 있다. 낡은 바위를 쌓아 만들어진 파사드가 서점의 손님들을 맞이한다. 2003년 이 서점이 자리 잡기 전까지 이 건물은 '자비의 여신'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미세리코르디아 Nuestra Señora de la Misericordia'라는 이름의 교회 예배당이었다.
바르셀로나 시는 18세기 중반에 지어진 낡은 예배당의 내부를 복원하되 기존 건축 요소를 충분히 보존하는 조건으로 사용 허가를 내주었다. 현재의 서점이 필요한 요소에 과거 예배당의 흔적들이 더해져 '라 센트랄 델 라발'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바르셀로나의 다른 '라 센트랄'과 다르게 라발지구에 있는 '라 센트랄 델 라발'은 유독 변화가 많았다. 공간의 변화와 함께 서점의 아이덴티티 변화에도 다양한 시도를 해왔는데 한 번의 변신에 그치지 않고 지속적인 변화를 추구해왔다. 그들이 달라지는 모습을 오랜 기간에 걸쳐 볼 수 있었던 건 내가 바르셀로나에서 살면서 누릴 수 있었던 작은 기쁨 중 하나였다.
18세기에 지어진 성당에서 21세기의 서점 그리고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즐길 수 있는바까지 '라 센트랄 델 라발'은 바르셀로나 사람들의 삶에 더욱 파고들었다.
독특한 그림책들 & 삐걱대는 마루
'라 센트랄'은 바르셀로나에서 설립된 서점으로 바르셀로나에 3곳, 마드리드에 2곳 이 있다. 우리나라의 교보문고 같은 카사델리브로 Casa del Libro 같은 일반 대형 서점보다 특별한 에디션의 책들이 훨씬 많다. 다양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 서점에서는 다양한 언어와 문화의 서적들도 쉽게 만날 수 있다. 스페인어로 번역된 한국의 소설, 영어로 번역된 한국요리 레시피, 독일인 그래픽 디자이너가 수집한 북한의 선전물 자료집과 같이 한국과 관련된 책들도 종종 볼 수 있었다.
지점마다 조금씩 다른 분야에 집중되어 있는데 '라 센트랄 델 라발'은 문화, 예술, 인문학에 중점을 둔 서점으로 총 8만 가지 종류의 책을 만나볼 수 있다고 한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코너는 예술, 사진 코너였다. 카탈루냐어와 스페인어로 쓰여있어 한 번에 이해할 수 없는 책들보다는 그림으로 보는 책들이 더 친근했다. 세계적인 명화, 화가, 미술관은 다른 시각으로 분석한 책이나 사진집들은 나에겐 새롭고 독특한 그림책과 같았다.
서점에 놀러 갈 때마다 봤던 책들이 책 부피만큼 가격도 비싸서 언젠가 나중에 하나쯤은 사야지 하고 미뤄두기만 했었다. 친구들에게 몇 권 선물만 하고 나를 위한 책을 사지 못한 게 너무 아쉽다.
'라 센트랄 델 라발'에 들어서면 예배당을 떠오르게 하는 볼트 형태의 천장이 먼저 눈을 사로잡는다. 서점 전체를 색색깔의 책과 함께 둘러보면서 걸으면 마룻바닥의 삐걱대는 소리가 들린다.
어린 시절 학교의 교실이 떠오르면서 어딘가 정겹고 따뜻하다. 그러나 말소리를 내는 것도 조심스럽게 고요한 서점에서 발을 디딜 때마다 소리를 내는 게 민망하다. 서점을 두세 번 구경한 다음부터는 들어갈 때마다 발의 힘을 최대한 빼고 가장 느린 걸음으로 아주 천천히 책을 둘러보게 되었다.
라 센트랄 바
서점 안쪽에는 야외 파티오로 연결되는 큰 유리 창이 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파티오 공간은 정리되지 않은 채로 외부인의 출입이 제한되어 있었다. 365일 중 300일은 날씨가 좋은 바르셀로나에서 저런 야외공간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게 아쉬웠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파티오 주변 공간에 파티션이 쳐지고 그 안에서 공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르셀로나 사람들의 속도에 맞춰 일 년이 다 되어갈 때쯤 파티오 공간은 예쁜 '바'가 되어있었다. 스페인에서 '바'는 술을 파는 어두운 술집이 아니다. 아침에는 카페 콘 레체 한 잔을 점심에는 보카디요를 저녁에는 타파스에 맥주 한잔할 수 있는 식당, 카페, 술집이 모두 더해진 공간이다. 이런 '바'가 서점과 연결해 문을 열었다.
여전히 가장 처음 지어진 건물의 형태는 최대한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실내와 완전한 실외 공간 그리고 건물에 둘러싸인 테라스 같은 공간까지 예전의 구도를 그대로 두고 활용한 듯했다. 천장의 높이도, 개방 정도도 다른 공간이 이어져 아주 흥미로운 곳이 되었다. 정원의 오렌지 나무, 예전 예배당에서 남겨둔 듯한 타일 장식, 모던하면서도 아주 바르셀로나스러운 가구들까지 구석구석 세심하게 꾸며졌다. 오픈한지 얼마 되지 않아 한국 사람들이 인스타그램을 보고 찾아올 정도로 유명해졌다.
바의 메뉴도 공간만큼 새로웠는데 가장 반가웠던 메뉴는 '김치 파니니'였다. 볶은 김치에 모짜렐라 치즈를 넣어 파니니로 눌러 구워냈는데 한국인의 호기심으로 주문했던 메뉴는 너무 맛있었다. 까냐 한 잔과 즐기기 좋은 다양한 타파스들이 가득했다. 물론, 커피와 곁들이기 좋은 베이커리 메뉴도 잘 준비되어 있었다.
따듯한 날 야외에서 햇볕을 쬐면서 타파스에 카냐 한 잔을 하다가 친구와의 대화할 거리가 줄어들면 서점에 들어가 책을 구경했다. '라 센트랄 델 라발'은 아침저녁 언제 가도 즐기기 좋은 하루 종일 찾을 수 있는 멋진 공간이 되었다.
그리운 공간과 날씨
긴 겨울이 끝나가는 요즘 뜨겁고 바삭한 바르셀로나의 햇볕이 많이 그립다. 그 햇볕을 쬐며 앉아 있을 수 있었던 '라 센트랄'도 삐걱대는 마룻바닥을 밝고 들어가 구경했던 커다란 그림책들도 오늘 같은 주말에 떠올리게 된다.
나, 아델
한국 회사 생활을 정리한 후 3개월 동안 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났다. 한 달을 보낸 바르셀로나는 꼭 살아보고 싶은 도시가 되었고 한국에 돌아온 지 6개월 만에 다시 떠나 5년이라는 시간을 바르셀로나에서 보냈다. 바르셀로나에서 카탈루냐 사람들은 나의 또 다른 가족이 되었고 다양한 국적의 유럽 사람들은 내 회사 동료 혹은 친구가 되었다. 바르셀로나 도시 자체를 너무 사랑했지만 이방인으로서의 생활은 쉽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는 그 도시를 사랑하는 마음만큼 미워하는 마음도 크기를 같이 하고 있다.
'나의 바르셀로나'는 이런 기억들을 조금씩 적어보는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