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역마살찐년 김짜이 Dec 11. 2018

어쩌다 생각난
돌다다미길의 그 카페

오키나와 카페 오토네코

오늘은 외근이 생각보다 일찍 끝났다.

회사로 복귀할 수도 있었는데 시간이 애매해 느적느적 카페에 가서 사진 정리를 하고 떡볶이를 먹으러 갔다가 그냥 집으로 도망쳤다. 내일 일은 내일의 내가 하겠지. 지하철 역부터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빨래를 할까, 뭔가 쓸까 고민하다가 카페를 선택했다. 집에 가 봤자 빨래는 안 하고 놀아제낄 게 뻔하니까. 막상 카페에 와서 앉았는데 뭘 써야 할지 막막했다. 이럴 때 쓰는 방법 중 하나는 찍어둔 사진을 생각없이 둘러보는 거다. 구글 포토를 켜고 맨 아래부터 천천히 스크롤을 올려가며 글감을 탐색했다. 써야 할 것은 쓰기 싫고, 쓰지 않아도 될 것을 굳이 쓰는 게 바로 나다. 어리석은 인간. 시험 기간에 책상 정리에 재미를 붙이는 기분으로 오키나와의 카페 이야기를 풀어본다.


쓰다 보니 또 얘기가 길어져서 중간에 리본 모양으로 표시를 해 놨다. 돌다다미길의 카페 오토네코가 궁금하신 분은, 다음 번 리본이 나올 때까지 스크롤을 내리시길.




지금으로부터 2년 전인 2016년 11월 30일, 나는 오래 다니던 회사를 퇴사하고 오키나와에 갔다. 퇴사하고 여행을 갈 생각은 아니었다. 12월에 생일도 있고 하니 끊어둔 오키나와행 표가 있었는데 그만 그 전에 퇴사를 해 버린 거다. 친구들이랑 3일 정도 짧게 다녀오려는 마음이었는데 기왕 퇴사도 한 거 비행기표 기간을 2주로 늘렸다. 두 번째 오키나와행이었고, 중간에 긴 기간이 심심할 것 같아서 대만도 다녀왔다가 세 번째의 오키나와 여행을 마치고 귀국을 했었다. 또, 또, 혓바닥이 길군.


친구들은 나와 함께 국제거리와 슈리성을 실컷 쏘다니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발걸음이 힘차구나, 친구들아... 혼자 남은 나는 뭘 할까 고민하다가 츠보야 야치문 거리를 털레털레 걸어가서 가게마다 구경하다가 게스트하우스에서 어젯밤에 함께 수다를 떨던 일본인 친구를 만났다. 야치문 거리 도자기 가게에서 일하고 있었다. 깜짝 놀라면서 반가워하다가, 이 근처에서 뭘 먹으면 좋냐고 조심스럽게 조언을 구해보았다. 두 곳을 추천해주었는데 좀 더 로컬 느낌이 나는 식당으로 갔다. 소고기가 올라간 소바였는데 약 600엔 정도를 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생각보다 푸짐했고 맛도 좋았다.

화분 사이를 눈여겨보시오.

그리고 이제부터는 뭘 할까 고민하면서 한참 걸었다. 걷다가 고양이를 만나서 눈싸움도 하고 골목 구석구석을 살펴도 시간이 남았다. 이때 아마 마호 커피도 갔었던 거 같은데... 분명한 기억은 아니다. 또렷한 건 그 카페의 엄청난 강배전의 쓴맛 뿐. 아무튼 그 다음으로는 슈리성 뒤쪽의 긴죠우쵸 돌다다미길에 들르기로 했다. 모노레일을 타고 슈리 역에서 내린 다음 슈리성 뒤편으로 엄청나게 걸었다. 

슈리성 뒤쪽 문을 지나서,

알 수 없는 높은 곳의 풍경도 지났다. 이거 어디서 찍었는지 모르겠다. 모노레일인가 싶어서 사진에 표시된 GPS를 살펴보니 돌다다미길 어딘가의 외곽 길이다. 지도만 봐서는 여길 왜 걸었지 싶은 골목인데 그때는 걸었었나보다.

뭔가 표지판이 영험하길래 쫓아와봤더니 우타키 느낌이 나는 곳이 있었다. 고요한 분위기 속에 아주 오랜 세월을 견뎌낸 나무가 서너그루 우뚝 서 있었다. 여기서 기도를 하면 돼, 라고 말하듯이 작은 비석들이 세워져 있어 조심조심 곁눈질로 구경했다. 이 때 후회가 하나 있다면 짧은 바지를 입고 간 것... 엄청난 산모기들에게 물어뜯겨서 이날 밤 내내 가려웠다. 또 혓바닥이 길었다. 원래 쓰려고 했던 카페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다시 돌다다미길로 돌아와서 하릴없이 걷고 걷다가 이상한 간판을 발견했다. 가정집 같았는데 문 앞에 영업중이라는 문패가 걸려 있었고, 간단한 메뉴판 그림도 붙여 놓았다. 대문 안쪽을 들여다보니 작은 나무 간판이 있었다. 한자는 잘 모르니 영어 위주로 열심히 읽어보았다. 오래된 집, 고양이, 좋은 스피커와 괜찮은 뷰를 자랑하는 카페로구만. 이름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들어가보기로 했다.

사실 이 대문 사진은 나중에 나오면서 찍은 거다. 들어갈 때는 카페라는 것만 알고 홀린 듯 들어갔었다.

가게 안엔 나 말고 한팀 정도의 일본인 손님들이 있었고, 사장님은 할아버지였다. 이 집 주인으로 보였다. 종이에 직접 쓴 메뉴판이 있었다. 차가운 물수건과 냉수를 내 주셔서 손을 닦고 냉수를 마시며 천천히 메뉴판을 들여다봤다. 고야 쥬스는 도전하기엔 좀 힘들 것 같아서, 무난하게 아이스 커피와 사타안다기 세트를 시켰다. 그리고 맨 오른쪽에 있는 오하기? 도 시켰다. 영어로 뭐라고 써 있었지만 모르는 단어였으니까 그림을 보고 판단했다. 얼추 팥 디저트겠거니 했다. 메뉴판 하단에 선불이라는 이야기가 써 있어서 동전을 준비해 두었다. 주문을 받은 할아버지가 곧장 주방으로 들어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음료를 준비하셨다.

이것저것 나왔다. 용과는 시키지 않았는데 서비스인 모양이었다. 커피는 평범한 맛이었고 사타안다기도 그랬다. 오하기는 딱 너무 달지 않은 팥앙금 맛이었다. 주문한 메뉴가 나오기 전까지는 남의 집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아서(정말 영락없는 가정집이었다) 어색했지만 내 앞의 테이블이 꽉 차고 나자 그제서야 약간 당당한 기분이 들어 여기저기 둘러보았다.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물어봤더니 흔쾌히 괜찮다고 하셔서 소심하게 몇 장 찍었다.

손님에게 개방된 곳은 거실이었는데, 넓은 유리창문 바깥으로 정성들여 꾸며진 정원이 보였다. 여러 꽃들을 열심히 기르시고 계신 듯 했다. 그리고 고양이 두 마리가 살고 있었다. 꼭 닮았다 싶었더니 엄마와 아들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름도 물어봤는데 지금은 까먹었다. 한 마리는 츄... 뭐시기였던 것 같은데. 츄라인가. 이 모든 이야기들은 하도 오래되어서 정확하지 않다는 점을 감안해주시길.

전부 나무로 지어졌고, 이것저것 소품들이 있었는데 굉장히 강렬한 에너지를 뿜고 있는 느낌이었다. 손님용 의자들도 전부 제멋대로였다. 둘러볼수록 진짜 일본의 가정집 한 켠에 앉아있는 기분이었다. 사진도 걸려있고.

뒤를 돌아보자 스피커가 보였다. 작은 소리였지만 중후한 음색의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무슨 노래였는지 영 기억이 안 나지만 <주말의 명화>쯤에서 들었을 법한 아주 오래된 노래였다.

무척 얌전했던 고양이들은 고양이답게 자기만의 시간을 가졌다. 가끔 뭔가 말하고 싶을 때는 얌전하고 아주 작게 야옹거렸다. 만지고 싶었는데 은근히 자리를 피하는 것 같아서 괴롭히지 않고 그냥 두었다. 그랬더니 나중에는 와서 몸을 부비기도 하고, 지나갈 때 만져도 가만히 있어주더라.


앉아서 휴대폰과 블루투스 키보드를 연결해서 뭔가 썼던 것 같다. 의자도 테이블도 낮아서 영 편하지는 않았지만 고양이와 다다미가 깔린 거실과 창 밖으로 흔들거리는 분홍빛의 부겐베리아 같은 것들이 예뻐서 그 시간을 오롯이 그냥 즐겼다. 고양이와 가까이 가려고 바닥에도 앉아보고, 맨발로 다다미 위를 밟으면서 마음껏 여행의 시간을 즐겼다. 카페 사장님인 할아버지랑도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었던 것 같다. 어디서 왔는지, 여행 중인지, 오키나와는 어떤지 등등 평범한 이야기들을.

창을 열고 나가보기도 했는데, 바깥에도 테이블이 있었다. 정말 다양한 식물들을 기르고 계신 게 보였다. 날이 따뜻한 곳이니 무엇이든 잘 자라겠구나 싶었다. 지대가 조금 높은 언덕에 지어진 건물이니만큼 초록초록한 나무들 너머로 동네의 풍경이 내려다보였다.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돌아와서 모든 걸 다 비우고 카페를 나섰다. 에어비앤비 같은 걸 운영하신다면 오래 머물 수 있을 것 같아 아쉬웠다. 아무래도 여행자의 욕심이겠지. 나오는 길에 간판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니 오직 일요일에만 여는 음악 카페였다. 일요일에 돌다다미길에 오기로 결심한 내가 아주 기특했다.

다 내려와서 카페를 올려다보았다. 해가 지면서 건물이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파라솔이 무척 예뻐보였다. 저 자리에도 한번 앉아볼걸.

돌다다미길을 몇 발자국 걷다가 문득 너무 많이 걸은 날이라는 게 떠올랐다. 슈리 역까지 뭔가를 타고 갈 수 없을까 싶어 길을 다 내려왔다가, 차가 그다지 많이 지나다지니 않는 자그마한 골목이 나오길래 단념했다. 다시 언덕을 올라 슈리 역으로 걸어갔다. 힘들어서 아주 천천히 걸었다. 그러다 문득 하늘을 보니 노을이 엄청나게 화려하게 지고 있었다. 마침 그 때 무슨 표지판 앞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한자로 공원이라고 쓰여 있는 것 같았다. 인적이 드물까봐 잠시 고민했지만 화려한 노을을 포기할 순 없었다. 피곤한 다리를 이끌고 언덕으로 올라가 노을을 감상했다. 좋았다.





글을 다 쓰고 구글링을 해 보니, 놀랍게도 홈페이지가 있었다. 오늘의 기운은 여기까지이므로 무책임하게 링크를 던지고 글을 마무리한다.

http://otoneko.net/

작가의 이전글 겨울 오키나와 여행 중 바닷속 보는 방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