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역마살찐년 김짜이 Mar 30. 2021

진짜 여행은
스물 여섯에야 시작했다

여행을 일로 시작했다.

스무 살, 아무것도 모르는 채 일당이 높다는 이유로 국내여행 가이드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여행이라고는 가본 적도 없는데다 대한민국 여행지에 대해서라면 고등학생 시절 한국지리에서 배운 게 전부인데도 어찌저찌 일을 해 나가기 시작했다. 새로운 풍경을 만나는 게 좋았고, 다양한 인간군상을 마주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서른 셋인 지금까지 일을 하고 있으니 꽤 오랫동안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정작 내 여행은 늦게 시작했다.

여행 가이드 일을 하고 있으니 이미 여행은 충분히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완전한 착각이었다. 주말마다 새벽같이 일어나 나가서 마흔 명 정도의 고객님들을 감당하면서 하루를 보내는 건 여행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건 여행보다는 '일'에 가까웠다. 스물 둘, 스물 셋에 멋모르고 내일로 여행을 다녀왔지만 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누가 쫓아오는 사람도 없는데 후다닥, 최대한 많은 곳을 다니려고 애썼다. 가이드로 여행을 갈 때는 세상 외향적인 내가, 혼자 여행을 할 때는 안전이 불안해서 누구에게도 말을 걸지 못했다. 그런 여행은 돌아오고 나서도 머릿속에 남는 게 없다. 단편적인 몇몇 풍경만이 스쳐 지나갈 뿐.


진짜 여행은 스물 여섯에야 시작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가이드 일과는 별개로 취직을 했다. 치열했던 인턴 과정을 거쳐 정직원이 되고 2년이 흘렀을 때, 알 수 없는 우울감과 좌절감이 찾아와 서서히 나를 좀먹기 시작했다. 번아웃의 전조 증상이었다. 번아웃이라는 단어 자체가 생소하던 때였으니 일시적인 증상으로 생각하고 넘겨 버렸다. 그러던 중, 충동적으로 휴가를 내고 한 번도 가지 않았던 곳으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부안이었다. 느즈막이 출발해서, 버스를 타고 가는 길에 숙소를 예약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들러본 관광지라고는 느적느적 동네를 산책하다 발견한 부안 향교와 노을을 보러 찾아간 채석강뿐이었다.


무언가에 쫓기지 않고 그때그때 내키는 대로 했던 여행이 처음인지라, 나는 신선한 자극을 받았다. 가이드 일을 하면서 하루에 세네 곳씩 들르는 여행에 너무나도 익숙해있었기 때문에 더 그랬다. 욕심 없이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가을의 기운이 꽉 차다 못해 터져버릴 것 같은 향교의 노란 은행나무 앞에서, 작열하는 태양에 금방이라도 뺨을 그을릴 것 같은 채석강의 노을 앞에서 나는 달라진 것 없이 달라졌다.


작가의 이전글 2019년 하반기 여행계획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