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역마살찐년 김짜이 Oct 21. 2021

나는 네가 노는 애인 줄 알았어!

어려서부터 우리 집은 가난했었고 남들 다 하는 외식 한 번 한 적이 없었고……. 아시죠? 들으면 어머니와 짜장면을 먹으러 가야 할 것 같은 GOD의 노래. 어린 시절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매우 공감했었는데요. 저희 집도 남들 다 하는 외식 한 번 한 적이 없었던, 형편이 넉넉지 않은 집이었기 때문입니다. 


노래 가사에서는 어머니가 짜장면이라도 사 주시지만 저희 집은 그런 것도 없었어요. 어린 저는 저와 동생이 너무나도 많은 양의 밥을 먹어치우기 때문에 가난한 걸까 하고 종종 생각했었습니다. 키가 어마어마하게 자라다 보니 밥도 그만큼 많이 먹어야 했거든요. 물론 저희 집이 가난한 건 진짜 그 이유 때문은 아니었겠지만 말이에요.


넉넉하지 않은 형편은 어떻게 해서든 티가 나기 마련입니다만, 다행스럽게도 제 친구들은 그런 사실을 몰랐어요.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속옷과 양말 외의 옷들은 단 한 번도 사본 적이 없었음에도 저는 제법 멀끔해 보였습니다. 친척들의 옷을 물려 입었기 때문입니다. 


엄마에게는 언니가 셋이나 있었고 세 명의 언니는 결혼해서 엄마의 조카, 즉 저의 사촌들을 길러내고 있었어요. 다섯 명의 사촌 중 네 명이 여자였고, 덕분에 저는 그 옷을 물려받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매우 원망했었지만요.


외갓집에 방문할 때마다 텅 빈 배낭이나 쇼핑백 등을 들고 가곤 했는데요. 처음에는 쓸데없이 이런 걸 왜 가지고 가나 물음표를 잔뜩 띄우고 갔었던 기억이 납니다. 외갓집에 도착하면 아무도 없었고, 동생과 저는 심심한 시간을 보내야 했죠. 이모들의 대학 전공 책을 읽어보려고 시도하다가 어려워서 그만두고, 뭔가 간식거리가 없나 기웃거리거나, 이모 중 누군가가 몰래 구해다 놓은 불법 복제 비디오를 보는 게 전부였습니다. 


그렇게 따분한 시간이 지나 저녁쯤 되면 멀리 사는 이모들이 도착합니다. 그때서야 텅 비운 채 들고 왔던 배낭이나 쇼핑백이 제 용도를 드러내죠. 이모들은 영문 모를 짐들을 한 보따리씩 짊어지고 왔는데요. 그 안에는 예상하셨겠지만, 옷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사촌언니들이 더 이상 입지 않지만 멀쩡한 상태의 옷들이었죠. 


엄마는 그중에서 디자인이고 색깔이고 아무것도 상관하지 않고, 오로지 사이즈만 고려해 옷을 추려냈습니다. 우리는 약간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곁에서 지켜봤습니다. 저 옷은 입기 싫은데, 저 옷은 마음에 안 드는데! 하지만 어린 시절의 저와 동생은 너무나도 순했기 때문에 차마 이모들 앞에서 볼멘소리를 할 수 없었어요.


외갓집에서 돌아오는 길, 우리의 등에는 그렇게 꾸역꾸역 채워놓은 가방이 얹혀 있었습니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씩 큰 제 키가 늘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저의 취향이라고는 전혀 고려되지 않은 옷들을 입을 때만큼은 더 빨리 자라나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 같아요. 결국 언니들의 키를 따라잡았을 때는 더 이상 옷을 물려받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제법 기뻤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물려 입은 옷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는데요. 엄마는 위로 언니들도 많았지만 아래로 동생들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중학생이던 사촌 언니들을 따라잡은 후에는 당시 20대였던 이모들의 옷을 물려 입기 시작했습니다. 초등학생이 어른의 옷을 입게 된 거죠. 꽤 난감한 일이었습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입기에는 20대 이모들의 옷들이 너무 화려했기 때문입니다. 몇 번이고 옷을 사달라고 점잖게 졸라봤지만 택도 없었습니다. 


사촌 언니들의 옷, 즉 어린이 옷을 물려 입었던 저학년 때는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고학년이 되어 어른의 옷을 입게 되자 뻘쭘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학년이 바뀔 때마다 새 친구를 사귀어야 하는데, 어쩐지 저에게 처음으로 접근하는 친구들은 소위 노는 아이들인 겁니다. 제법 껄렁한 태도와 언제든 일탈할 수 있도록 불량한 마음가짐을 가다듬는 어린이라니! 도저히 친구가 될 수 없었습니다.


키만 컸지 욕 하나 할 줄 모를 정도로 어리숙한 저의 실체를 알자마자 그 친구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멀어졌습니다. 그러자 저와 비슷한 친구들이 다가왔습니다. 세상에 별 불만이 없고 얌전하기 그지없던 친구들은 하나같이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처음에 나는 네가 노는 애인 줄 알았어!


딱히 학원도 안 다니고 매일매일 놀아제낀 걸로 봐서는 노는 애가 맞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그 뜻이 아니었을 겁니다. 내가 왜 그렇게 보였냐고 묻자, 큰 키에 너무나도 어른스러운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친구들아, 이건 어른스러운 옷이 아니야. 어른의 옷이지. 정정해주고 싶었지만 물려 입은 옷이라는 게 들통날까 봐 조용히 입을 다물었습니다.

이전 04화 너 키 몇이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