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이었던 시절이 이제는 제법 먼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새 학년이 될 때마다 마음을 조여오던 긴장감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데요. 3월마다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는 기쁨과 친했던 친구들과 다른 반이 되어 헤어지는 슬픔이 한 번에 휘몰아쳐서 혼란스러운 상태가 되곤 했어요. 하지만 이 새로운 얼굴들 중 누가 내 친구가 될지 모르기 때문에 내색하지 말아야 할 것 같은, 소위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표정을 단단히 굳히고 앉아 있곤 했습니다. 여기까지는 다들 비슷한 마음이지 않을까 싶어요. 하지만 제게는 또 다른 스트레스가 하나 있었는데요. 과연 몇 명이나 내 키를 물어볼까, 하는 것이었어요.
늘 또래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기 때문에, 모두 은근슬쩍 제 키를 궁금해했습니다. 새로운 사람 앞에서 신중하게 굴게 되는 건 어린이들도 마찬가지죠. 멀찌감치서 벌써부터 무리를 이룬 아이들이 이쪽을 바라보며 무슨 이야기인가를 주고받으면, 저는 으레 짐작하곤 합니다. 아, 쟤들 또 내 키 얘기하는구나. 직감은 언제나 틀릴 일이 없어요. 사실 직감이라고 하기도 뭐할 정돕니다. 노골적으로 이쪽을 바라보며 수군거리고 있으니까요. 학기 초이니만큼 뭔가 제가 잘못한 건 없을 거고, 저에게서 특별한 건 키뿐이니 당연히 키 얘기를 할 것이다. 그런 식으로 생각이 이어지곤 했습니다. 과연, 단순한 추리는 틀린 적이 없어요. 그중 한 명이 조심스레 다가와서 묻곤 했으니까요.
너 키 몇이야?
어릴 때는 이 질문이 정말로 싫었어요. 일단, 너무 많이 받은 질문입니다. 지겨웠어요. 모든 집단에서 대표자 한 명씩 제게 물어보러 옵니다. 그 반 전체의 인원이 다 알 때까지 저는 같은 질문을 몇 번이고 받았습니다. 또래들뿐만 아니라 선생님들도 새로운 것을 만난 표정으로 제 키를 물어보기도 했어요. 정말이지…….
하지만 지겨운 것보다 싫었던 건, 그 질문이 주는 어감이 긍정적이지 않았다는 겁니다. 너, 우리와 다르구나. 너의 다른 점이 궁금하다. 지금은 백 명의 인간이 있으면 그 백 명이 모두 다 다르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린이일 때는, 남들과 다르다는 게 남들과 구분된다는 것으로 인식이 되었고, 구분된다는 것은 그들과 가까워질 수 없다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설령 그 질문이 단순 호기심이라 할지라도, 누군가에게 외모로 호기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어요. 예쁘다던지, 잘 꾸민다던지 하는 소위 긍정적인 이야기들이 아닌, 정말 말 그대로 ‘신기한 무엇’이었거든요. 아주 가끔은, 우리 속 동물이 된 것 같기도 했어요. 그래, 너희들은 나를 구경하고 있구나. 나는 너희와 같은 친구가 아니라 신기한 어떤 것일 뿐이구나. 사람을 대하는 것 같지 않은 그런 얄팍한 시선들이 너무나도 진절머리가 났습니다.
학기 초야 뭐, 아주 많이 양보해서 처음 만나는 키 큰 친구가 새로울 수 있다고 칩시다. 하지만 가장 슬픈 건 언제나 학기 말의 롤링 페이퍼 타임이었어요. 적극적인 반장이나 선생님이 있는 경우에 학기가 끝날 때, 또는 생일을 맞았을 때 큰 종이를 구해와서 각자의 이름을 크게 적고 종이를 돌려가며 종이에 적힌 사람에게 쓰고 싶은 말을 써 주는 풍습이 있었는데요. 요즘도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런 풍습에 따라 종이는 반 전체를 한 바퀴 돌고, 아무리 쓸 말이 없다고 해도 무슨 말이라도 써서 주는 게 예의였기 때문에 별로 친하지 않은 친구의 종이가 도착하면 꽤 머리를 쥐어뜯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이들의 손을 거친 종이는 결국 이름의 주인에게 도착하게 되는데요. 당시 조용했던 저는 친구를 많이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이름만 아는 반 친구들이 써 주는 이야기란 키 얘기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건 제게 꽤 큰 좌절감을 주었습니다.
제가 피구를 잘한다면 어땠을까요? 발표를 잘했다면? 친구가 많아서 반장이 되었다면요? 만약 그렇다고 하면 과연 키 얘기가 아닌 다른 얘기가 쓰여 있었을까요? 그래도 키 얘기가 쓰여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거기다 저는 그렇게까지 특별할 것 없는 초등학생이었어요. 하지만 저는 키가 큰 것 말고도 많은 장점이 있는 사람인데, 거의 대부분 그걸 모르거나 알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롤링 페이퍼를 받을 때마다 저는 키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인 것 같아서 매우 쓸쓸해하곤 했어요.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초등학생이 뭘 알겠느냐, 초등학생에게 뭘 바라는 거냐, 그렇게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어요. 맞아요. 저도 어느 정도 자라고 나니까 알겠더라고요. 저 또한 타인에게 그렇게까지 관심이 있는 편은 아니었고, 따라서 비슷하게 무심했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사실을요. 어른이 되고, 큰 키를 더 이상 콤플렉스로 여기지 않게 되자 저는 그냥 웃으면서 질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롤링 페이퍼를 다시 받는다고 해도 어쩌면 그들의 인생에 있어서 여자 중 가장 큰 사람으로 기억에 오랫동안 남을 수도 있을 거라 여기기로 했습니다. 오히려 선수를 치기도 합니다. 자기소개를 할 기회가 있을 때, 일부러 이렇게 말해버려요.
어차피 물어보실 거니까
미리 말씀드리는데요,
제 키는 180cm입니다.
이렇게 말해도 또 물어보실 거 알아요.
괜찮아요.
편히 물어보세요.
제가 제 키에 편해지고 나자, 관심 또한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어린 시절의 제가 한심하거나 하진 않아요. 그땐 어렸고 잘 몰랐고 또 여렸으니까요. 그때에 비해서는 단단한 마음을 가지게 되어 정말 다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