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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역마살찐년 김짜이 Oct 21. 2021

1학년은 저인데요!

저의 다름을 스스로 자각하게 된 계기가 유치원 졸업식에서의 학사모 사건이었다면, 저의 다름을 남에게 인정받게 된 계기는 초등학교 입학식이었습니다. 


1996년도, 국민학교가 초등학교가 된 그 해 초등학생이 되었습니다. 여러 어린이들이 그렇듯 저 또한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순간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유치원생’이라는 단어는 타이틀이라고 보기 어렵지만, ‘초등학생’은 하나의 타이틀로 보기에 부족함이 없잖아요. 짧은 인생에서 타이틀이란 것을 처음으로 획득하는 순간이었기 때문에, 입학식 날에는 아침부터 혼자서 오두방정을 떨었던 기억이 납니다. 


똘똘하다는 칭찬을 제법 듣고 자랐던지라 저는 제가 초등학생이 되면 무척이나 활약을 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스스로에 대한 기대가 매우 컸죠. 아무도 칭찬해주지 않았는데 혼자 자신감이 넘쳐서 어깨를 한껏 으쓱거리며 학교로 향했습니다. 그래 봤자 엄마 손을 꼭 붙잡고 걸어가는 어린이 중 한 명일뿐이었지만요.


집에서 학교까지는 어린이 걸음으로 대략 10분 정도 걸렸습니다. 저와 엄마만 걸어갔다면 조금 빨랐을 수도 있지만, 엄마의 다른 쪽 손은 저보다 세 살 어린 동생이 꼭 붙잡고 있었어요. 날아가려는 마음과 달리 천천히 학교로 가야 해서 한없이 조바심이 났습니다. 학교에 영원히 도착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마저 들었어요. 그래도 결국 학교의 정문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문을 통과해 운동장에 발을 내딛자 짜릿함이 온몸을 휘감았습니다. 


이제, 이제 나도 학교 다니는 언니다!


저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 보이는, 기껏해야 서너 살 정도 차이가 나겠지만, 고학년들이 있었기 때문에 직접 외치지는 못했어요. 대신 붙잡은 엄마 손만 실컷 흔들며 구령대로 향했습니다. 큼지막한 종이에 반 배정이 쓰여 있었어요. 저는 제 이름 석 자를 찾기 위해 열심히 눈을 굴렸습니다. 얼마나 들떴는지 엄마보다 빨리 제 이름을 찾아냈어요. 지금 기억으로는 1학년 11반이었던 것 같은데 맞는지 모르겠네요. 각자 배정된 반을 찾아서 줄을 서는 흐름이었기 때문에 엄마와 저는 눈치껏 1학년 11반을 찾아갔습니다.


왼쪽부터 1반이 설 테니까, 아마 11반은 운동장의 오른쪽에 있을 것이었습니다. 열심히 걸어가자 1학년 11반이라는 팻말이 보였습니다. 엄마 손을 놓고 마구 달려가 줄을 서고 싶었지만 아무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럴 수는 없었어요. 얼굴이 뜨끈뜨끈하게 달아오를 정도로 들뜬 상태였지만, 그만큼 긴장하고 있었거든요. 잠시 서 있자 저 멀리서 선생님으로 보이는 어른이 다가왔습니다. 드디어, 내 무대가 시작된다!


하지만 다가온 선생님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제가 아닌 동생의 손을 잡으셨습니다. 순간 매우 당황했지만 들뜬 어린이 특유의 순발력으로 황급히 외쳤습니다.


1학년은 저인데요, 선생님!


날카롭게 터져 나온 제 목소리에 선생님은 깜짝 놀라시더니 저와 동생을 번갈아 보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입학식이 거행되기도 전에 선생님께 당당히 항의하는 1학년은 아마 처음이시지 않으셨을까 싶어요. 선생님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않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머, 미안해라. 네가 3학년인 줄 알았어. 키가 커서.


저는 사랑받고 자란 어린이답게 당연히 제가 환영받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선생님은 저 대신 동생의 손을 잡아버렸고, 저는 선택받지 못한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습니다. 꿈꿔왔던 초등학교에서의 화려한 활약이 망가져버린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도 실망한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고 매우 힘을 썼습니다. 더 이상 유치원생이 아니었으니까요. 떼를 쓰는 건 학생이 되기 전까지만이라고 속으로 굳게 다짐했었거든요. 


스스로가 세운 다짐은 잘 지켜냈지만, 충격은 마음속에 깊이 남았습니다. 유치원 졸업식 때 깨닫긴 했지만, 처음으로 누군가가 저의 다름을 인정한 순간은 새로운 충격이었어요. 어린 시절에는 다른 게 틀린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잖아요. 다른 건 다른 것일 뿐인데도요.



*하지만 이 역시 지금 생각해보면 웃긴 에피소드일 뿐입니다. 저희 집안의 키 유전자가 얼마나 대단하면, 갓 초등학교에 입학할 여자아이가 3학년으로 보였겠어요. 거기다가 고작 다섯 살인 여동생이 자연스럽게 1학년으로 받아들여질 정도면 말 다 했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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