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거길 굳이 왜 가?’
미얀마? 거길 굳이 왜?
나의 갑작스러운 미얀마행을 들은 사람들의 질문이 시작되었다. 하긴 나에게도 생소한 나라였으니… 무엇보다 내가 미얀마를 결정한 이유는 퍼스에서 캄보디아까지 미얀마를 거쳐서 가면 비행기 푯값이 좀 더 내려가기 때문이었다. 이왕 떠난 거 두 나라를 여행하면 좋으니까…
요즘 미얀마에서 뜨는 지역은 바간(Bagan)이라고 하지만, 나는 양곤(Yangon)으로 향했다. ‘양곤’, 뭔가 알 수 없는 끌림이 느껴졌다. 게다가 양곤에는 쉐다곤 파고다(Shwedagon Pagoda)라는 걸출한 장소도 있다니,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이번 여행은 휴식을 하러 가는 목적이 컸다.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 3주 정도를 휴일도 없이 일을 강행하면서 몸도 마음도 약간 지쳐있었다. 떠나기 전날이 되어서야 비행기 시간과 세부적인 내용을 확인했다. 비행시간은 새벽 6시. 너무 이른 시간이라 못 일어날 것 같아서 차라리 잠을 안 자는 게 낫겠다 싶었다. 밤을 꼴딱 새우고 퍼스 공항에 도착했다.
캡슐 호텔 개인 침대에서 보이는 뷰. 아담하고 혼자서 지내기 딱 좋다. 따로 문은 없고 블라인드를 치면 된다
저비용 항공인 에어 아시아를 타고 퍼스(Perth)에서 말레이시아(Malaysia)를 경유해 미얀마로 향하는 스케줄이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5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전날 밤을 지새우는 바람에 잠깐이라도 편하게 쉬고 싶었던 나는 쿠알라룸푸르 공항에 있는 캡슐 호텔을 이용했다. 사용료는 우리 돈으로 2만 3천 원 정도(6시간 기준)였는데, 수건을 비롯한 대부분 물품이 제공돼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공항에서 발이 묶인 여행자들에겐 최고의 시설이 아닐까 싶다.
얼마 전부터 나시 라막(Nasi Lemak, 말레이시아 전통 음식)이 자꾸 생각났는데, 기왕 경유하는 김에 저녁으로 먹기로 했다. 다행히 공항 내 한 식당에서 발견, 바로 주문했다. 오랜만에 먹는 나시라막은 충분히 감동적이었는데 같이 시킨 오렌지 스무디까지 훌륭했다. 완벽한 하모니였다.
비정상 회담에서도 소개가 된 적 있는 말레이시아의 국민 음식, 나시 라막(https://www.flickr.com/photos/28922784@N00/14662488442)
그렇게 공항에서 5시간을 대기하고, 다시 출국 수속을 밟았다. 퍼스에서 아침 6시에 출발했던 비행기는 저녁 8시가 되어서야 미얀마 양곤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는 약간 웃긴 에피소드가 있었다.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고 있던 때였다. 갑자기 옆 좌석에 있던 젊은 남자가 나를 툭툭 치더라. 이어폰을 빼고 쳐다보니 건너편의 아저씨가 나를 부르고 있는 게 아닌가? 무슨 일인가 싶어서 물어보니 그 아저씨는 미얀마 사람이었는데 나를 영어 할 줄 아는 미얀마 사람으로 오해했던 거다. 기내에서 나눠주는 영어로 된 입국 수속서를 해석해 달라고 나를 부르고 있었던 거다.
동남아 어디를 가든지 나를 현지인처럼 보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그러려니 했는데, 뭔가 상황이 웃겼다. 나는 옆에 앉았던 남자에게 ‘나 미얀마 사람 아니다’라고 하니까 그 남자는 건너편 아저씨에게 손짓으로 ‘X’를 그리며 전했다.
그 남자는 혼혈 아시아인처럼 보였다. 남자가 갑자기 유창한 영어로 말을 건다. 어디에서 왔냐고 물어본다.
‘난 한국인인데 넌?’
‘Take a guess!’
‘음.. 호주 사람?’
‘아니’
‘그럼 미국인?’
‘Yes!’
그렇게 우리의 대화는 시작됐다. 그 친구의 뿌리는 베트남이지만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미국인이었다. 특이하게도 한국 기업에서 인턴십을 하고, 싱가포르에서 교환학생으로 있기도 했단다. 그래서 우리는 대화가 더 잘 통했는데, 특히 싱가포르 험담을 하면서 더 친해졌다. 그는 내가 혼자서 여행을 한다고 하니 멋지다며 칭찬을 했다. 자신도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동남아를 여행하는 중이란다.
쿠알라룸푸르에서 미얀마로 가는 2시간 동안 우리는 수다를 떨었고, 아시아인 외모의 두 명이 영어로 대화를 하니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보기도 했다. 그 친구는 에어비앤비(Airbnb)로 숙소를 예약했는데 내 숙소 위치가 근처라면 같이 택시를 타잔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콜’
미터기가 따로 없는 미얀마의 택시는 부르는 게 값이다. ‘카더라’지만, 그냥 서 있는 택시보다는 달리고 있는 택시를 잡으면 조금 더 안전하단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
드디어 미얀마에 도착했다. 우리는 공항에서 환전하고 나는 심(SIM) 카드를 샀다. 공항 밖으로 나오니 택시 흥정꾼들이 참 많았다. 사실 나는 동남아 여행을 자주 다니면서 흥정꾼들과의 경험이 많은 편이라 가격 협상에서는 꽤 자신 있었다. 공항에서 시내 쪽으로 나가려는데 꽤 많은 돈을 부르는 게 아닌가. 미국인 친구는 마음이 약해진 건지, 그들의 제안에 쉽게 거절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딱 잘라 거절하면서 ‘만 원’이 한계라고 말했다. 우리에게 몰렸던 택시 기사 무리 중 한 명이 그렇게 해주겠다며 자기 차에 타라고 한다.
우리는 짐을 트렁크에 싣고 차에 올라탔다. 잠시 후 택시가 출발했는데, 얼마나 빨리 달리던지 우리는 차 안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였다. 택시기사는 처음에 나의 숙소로 먼저 가 달라던 부탁을 까먹었는지 미국인 친구의 숙소에 먼저 도착했다. 그가 내리기 전 우리는 저녁이나 한 끼 하자며 페북 연락처를 교환했다. 몇 분 후 숙소에 잘 도착했다며 연락이 왔고, 나는 숙소로 이동 중이라고 답했다.
양곤의 시장. 정겨운 모습이긴 하지만 청결하다고 하기에는 머뭇거리게 된다. 나는 음식에 조금 민감한 편이라 현지 시장에서는 아무것도 사 먹을 수 없었다. 그래도 호스텔 발코니에서 시장 풍경을 보는 건 좋았다. 이른 시간부터 바쁘게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한참을 달려도 내가 묵을 숙소는 나오지 않았다. 택시 기사가 위치를 모르는 눈치였다. 지도를 아무리 봐도 위치 파악이 힘들어서 숙소로 전화를 걸었는데 안 받는단다. 그렇게 한참을 같은 지도만 들여다보는데 그런다고 답이 나올 리 없었다. 시간만 자꾸 흘러갔다. 그러다 택시 기사가 갑자기 뒷자리에 있던 나에게 자기 옆자리에 타라고 한다. 내가 뒷자리에서 지도 보여주는 게 불편해서 그런가 싶어 그의 말대로 옆자리에 앉았고, 택시는 다시 출발했다.
지도를 보면서 가는 중에 옆을 봤는데, 뭔가 이상했다. 그렇다. 택시 기사의 바지가 내려가 있었고 손은 그곳에 있었다. 나는 ‘무섭다’라는 마음보다는 너무 어이가 없고 화가 났다. 나는 당장 차를 세우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경찰에 신고할 거라고, 내 짐도 당장 빼라며 계속 화를 냈다. 택시 기사는 나의 격렬한 반응에 당황했는지 차를 세웠다. 혹시나 택시 기사가 나만 내려놓고 그냥 출발할까 싶어서 ‘당신부터 내려서 트렁크를 빼라’고 윽박질렀다. 다행히 택시 기사는 순순히 트렁크를 열어서 내 짐을 내렸고, 이내 후다닥 차를 타고 도망갔다.
이른 아침 차이나타운의 풍경. 낡은 건물들이 대부분이다
길가에는 나와 캐리어만 덩그러니 남게 됐다. 참 어이가 없었다. 어두컴컴한 길거리에는 쥐가 돌아다니고 지나가는 남자들은 휘파람을 불었다. 변태 때문에 정신없었던 나는 어디를 가야 할지 몰랐다. 다시 택시를 잡자니 좀 전에 그 일 때문에 겁이 났다. 어쩔 수 없이 아까 그 미국인 친구에게 이 상황을 하소연하니 전화가 왔고, 그는 나에게 거기가 어디냐며 격한 걱정을 해줬다.
통화 덕분에 약간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이 자리에 계속 있을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최대한 경계하며 택시를 다시 잡았다. 택시 기사는 인자해 보이는 나이 든 인도 아저씨였는데, 숙소 주소를 주니 역시나 못 찾는 게 아닌가. 어쩔 수 없이 미국 친구가 묵는 아파트의 호스트에게 통역을 부탁했고, 드디어 숙소를 찾을 수 있었다.
THANK GOD!
정말 이 친구 아니었으면 나는 이 날 숙소에 도착이나 할 수 있었을까 싶다. 하지만 예상시간보다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이 친구와의 저녁은 무산됐다. 우리는 서로에게 남은 시간 동안 여행을 잘 하라며, 메시지로만 인사할 수밖에 없었다.
현지 시장에서 본 꽃들. 너무 예뻤다. 미얀마에는 떠돌이 강아지(Stray dog)가 많다. 예전에 싱가포르에서 키우던 강아지 베지와 닮았다.
힘들게 찾아간 숙소도 말썽이었다. 숙박 사이트에서는 나름 평점이 좋은 곳이었지만 실제로 가보니 너무 실망했다. 시설도 안 좋았을뿐더러 이불에 누워서 자려는데 몸이 자꾸 가려운 느낌까지 들었다. 당장 다른 호텔을 예약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서칭 후에 결국 마음에 드는 호텔을 발견하고 예약했다. 직원들에게는 내일 체크아웃을 하겠다고 전했다. 여행 첫날,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긴박하고 허무하게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