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포 선셋
2018년 4월 25일, 나는 우연히 독일 뮌헨을 방문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아빠와 형이 독일에서 열리는 박람회에 가게 되었고, 이미 예약된 숙소를 내가 공짜로 이용할 수 있었다. 비행기 값만 마련하면 되는 상황에 놓인 나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여행을 준비하며 문득 1년 전 프라하에서 만난 슈테판 융이 떠올랐다. 다시 만날 기회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나는 출발 전날 그의 인스타그램에 메시지를 남겼다.
“혹시 이번 주말에 시간 돼? 나 뮌헨에 갈 거 같아!”
그는 몇 시간 뒤 답장을 보내왔다.
“정말? 시간 알려줘! 마리엔플라츠에서 만나자.”
약속한 날, 나는 뮌헨의 중심부인 **마리엔플라츠(Marienplatz)**에 도착했다. 넓은 광장을 가득 채운 관광객들과 웅장한 **신시청사(Neues Rathaus)**가 눈에 들어왔다. 건물의 화려한 고딕 양식과 맑은 하늘이 어우러진 풍경은 그 자체로 감탄을 자아냈다. 시계를 보며 광장을 둘러보던 중, 멀리서 다가오는 슈테판을 발견했다. 그는 여전히 프라하에서 봤던 그 밝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이야! 여행 잘 왔어?”
“응, 잘 도착했어. 여긴 진짜 멋지다.”
“맞아. 이제부터 제대로 보여줄게.”
그렇게 우리는 신시청사 앞에서 다시 만났다. 걷다가 나는 그에게 물었다.
“근데 오늘 약속 없었어?”
슈테판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수업 빼고 왔지. 너랑 놀려고.”
우리는 짐을 코인락커에 맡기기로 하고, 내 가방과 그의 노트북까지 모두 넣은 뒤 가벼운 마음으로 도시 탐험을 시작했다.
슈테판은 뮌헨의 숨겨진 매력들을 하나씩 소개해 주었다. 그가 처음 데려간 곳은 이잇바흐강(Eisbach) 위의 Kleine Eisbachwelle였다. 빠르게 흐르는 강물 위에서 서퍼들이 줄을 서서 한 명씩 물살 위로 뛰어들며 서핑을 즐기고 있었다. 그는 이곳을 “리버 서핑(River Surfing)”이라 불렀다. 서퍼들의 완벽한 균형과 물살을 가르며 자유롭게 움직이는 모습은 경이로웠다. 나는 이런 장면을 도시 한가운데서 볼 거라 상상조차 못 했다.
슈테판은 웃으며 말했다.
“신기하지? 이게 뮌헨이야. 그냥 강에서 서핑하는 사람들. 누가 이런 걸 생각했겠어?”
그날은 마침 FC 바이에른 뮌헨과 레알 마드리드의 챔피언스리그 준결승전이 열리는 날이었다. 슈테판은 나를 **뮌헨의 대형 비어가든 중 하나인 호프브로이하우스(Hofbräuhaus)**로 데려갔다. 야외 좌석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했지만, 다행히 빈 자리를 찾아냈다. 우리는 시원한 맥주와 학세(Haxe, 독일식 족발)과 슈바인브라텐(Schweinebraten, 바이에른 지역의 전통 요리 중 하나인 **쇠고기 또는 돼지고기 브라텐(Braten)**)며 경기를 보기 시작했다.
맥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던 중, 슈테판이 갑자기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해. 같이 아이슬란드도 갔었는데 아무 일도 없었어. 근데 같이 있으면 너무 재미있고, 취미도 잘 맞아. 그렇다고 이게 연애로 이어질 것 같진 않단 말이지. 너라면 어떻게 할 거야? 노력해 볼까, 아니면 포기하는 게 나을까?”
그의 진지한 표정을 보며 나는 순간 멍해졌다. 프라하에서의 짧은 만남과 1년의 공백이 무색할 만큼, 그는 나에게 속 깊은 고민을 털어놓고 있었다. 그가 나를 단순한 여행 동반자가 아닌 진짜 친구로 여기고 있다는 게 그제야 느껴졌다.
“내가 너라면, 우선 네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생각해볼 것 같아. 노력한다고 좋아질 관계라면, 한 번쯤 도전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슈테판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그날의 경기는 바이에른 뮌헨의 아쉬운 패배로 끝났다. 분위기가 고조되지는 않았지만, 맥주와 학세를 나누고 서로의 이야기를 나눈 시간은 그 어느 때보다 특별했다.
그런데 하루가 완벽할 수만은 없었다. 코인락커를 열려고 보니 열쇠가 없어진 것이다. 내가 얼굴이 새파래지며 당황하자, 슈테판도 약간 놀란 듯했다. 그러나 이내 안내 번호를 확인하더니 전화를 걸었고, 약 3분 후 락커 관리인이 걸어왔다. 다행히 퇴근 시간 전이라 문제없이 해결할 수 있었다.
그는 침착하게 관리인에게 독일어로 상황을 설명했고, 잠시 뒤 마스터키로 락커를 열어 주었다.
비록 그 이후로 우리는 대면할 기회를 갖지 못했지만, 서로의 여행 사진에 좋아요를 누르고, 간간이 안부를 묻는 메시지로 여전히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프라하에서 말을 걸지 않았더라면? 연락처를, 아니 인스타그램 아이디라도 주고받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 자리에서 슈테판과 함께 맥주잔을 부딪히며 웃고 있는 내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주마등처럼 떠오르는 그 순간들이 지금의 이 여행을 만들어줬다는 생각에 마음 한편이 따뜻해졌다.
1년 만에 다시 만난 슈테판과의 뮌헨 여행은, 짧았지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예상치 못한 만남과 작은 해프닝들이 결국은 가장 빛나는 순간을 만들어 준다는 것을 또 한 번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