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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tori Mar 13. 2020

[프롤로그] 29살 10월, 떠나기로 했다

5개월간의 동남아 배낭여행 일기


  마지막이라는 단어는 누군가에게는 설렘, 누군가에게는 곧 끝이 난다는 불안감을 주는 단어이다. 나에게 마지막이라는 단어는 후자에 해당되었다. 쳇바퀴 굴러가듯 굴러가는 삶에 회의감을 느꼈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그렇다고 해서 무언가를 노력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발전이 없이 산다는 우울함에 항상 고민이 많았다. 이러한 고민은 20대의 마지막인 29살에 시작된 것은 아니다.


 매년 초, 그러니까 1월이 되면 버킷리스트를 작성한다. 버킷리스트를 작성하면서, 작년에 무엇을 했는지 되돌아 생각해보고 무언가를 이룬 게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죄책감에 시달린다. 누가 손가락질한 것도 아닌데 말이지.

 내가 나를 과감하게 평가해보자면 게으르다. 그러면서 생각은 많다. 이루고 싶은 것은 많지만 실천은 하지 않는다. 그리고 속상해한다. 이런 사람들을 보고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라고들 하던데, 맞다. 나는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다.

나를 모르는 사람들은 과감하고, 성격도 시원시원하고 (말을 세게 해서 그런지 몰라도) 자신감 있어 보인다고 하지만 나는 사람들의 눈치도 많이 보고 낯도 많이 가리고 생각도 많다. (쓰잘데기 없는 생각 말이다.)

내 주변 사람들은 나를 항상 칭찬해 준다. 성격도 좋고, 한다면 하고, 계획해서 열심히들 산다고 말이다. 아마도 주변에 이런 좋은 사람들 덕분에 인지 자존감이 그래도 완전 밑바닥은 안 친 것 같다. 그러나 내 기준에 나는 역시나 자존감이 낮다.


 대학생 때 나는 그냥 놀기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학창 시절 부모님의 그늘 밑에서 못 놀던 한이라도 풀 듯이 정말 미친 듯이 놀았다. 그렇다고 해서 생산성 있게 재미나게 논 것도 아니지만, 술은 정말 내 인생에서 사는 동안 마실 술은 다 마신 것 같다. 그렇게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 채로 졸업을 하고, 싱가포르로 보내졌다.

 여기서 왜 "보내졌다"라는 말을 썼는가 하면, 정말 말 그대로 보내졌기 때문이다. 대학 졸업 이후 부모님은 지원을 끊는다고 하셨고, 싱가포르에 동생과 함께 살고 있는 이모 (친 이모는 아니지만 지금은 나의 소울메이트) 가 엄마에게 "20살 넘었으면 다 컸지 뭘 그렇게 해줄 생각을 해! 언니~~ 그냥 싱가포르로 보내! 던져놓면 다 알아서들 해!" 

라는 말 한마디에 나는 그냥 "보내졌다." 이모의 말은 맞았다. 나는 어떻게든 살았다. 영어를 못했지만 어떻게든 학원에 취직해서 데스크에 앉아서 업무를 보았고, 그러다가 어떻게 기회가 생겨서 회사에 들어갔다. 나는 악착같은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 회사에서도 무난하게 1년을 보냈다. 그러다 건강의 문제로 한국에 돌아왔지만 결국 다시 싱가포르로 돌아가게 되었다. 다시 돌아간 싱가포르에서도 운 좋게 회사에 취직을 했고, 그곳에서 3년 반의 시간을 보냈다. 회사를 다니면서 아니 싱가포르에 살면서 보면 내 주변 사람들은 소위 말하는 "능력자"였다. 어떻게 보면 같이 살던 내 동생도 한국에서 남들이 보면 소위 말하는 "유학파" 중에 하나였다. 부러웠다. 나도 유학 갔었으면 조금 더 나은 삶을 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만 하면서 지냈다. 그 시간에 노력해서 공부할 생각은 안 하고 말이다.

 그렇게 매년 초가 되면 나에게도 꽃샘추위가 왔다. 내 인생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고민하고 뭘 하고 살아야 하나를 항상 생각했다. 그 생각의 끝은 항상 "퇴사"였다. 하지만 나는 퇴사를 하지 못했다.

회사에서 주는 안정적인 급여, 그리고 이렇게 매일매일 하루 패턴이 똑같아도 남들보다는 훨씬 안정적으로 잘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안정감을 내 손으로 버리지 못했다.

무언가를 해야지 해서 운동도 하고, 바디 프로필도 준비하고 난리를 쳤지만, 그건 한순간이었다.

본질적인 게 해결되지 않으니 항상 제자리로 돌아왔다.



 결국 나는 퇴사를 드디어 결심했다.

 그러나 이 퇴사를 결심하고 나서도 내가 가장 처음 먼저 한 행동은 "부모님께 나의 퇴사 의견 물어보기"이었다. 통보가 아닌 어떻게 보면 허락 맡기랄까? 당연히 부모님의 대답은 "NO"였고, 나는 그 단어 한마디에 또 우울해졌다. '내 의견을 지지받지 못하는구나, 그만두고 돌아가면 환영받지 못하겠구나'라는 생각에 며칠을 혼자 우울해하며 지냈다. 그러다 결국 화산이 폭발하듯 감정이 터져 괜한 엄마한테 전화해서 시시콜콜한 것부터 시작해서 트집을 잡으며 울기 시작했다. 그렇게 3시간을 내리 울고 배가 고파져 밥을 먹으러 갔다.

집에 돌아온 이모는 내 얼굴을 보고 "어머 얘, 너 섀도우 색깔 예쁘다. 무슨 그런 주황색이 다 있다니?"라고 했다.

"이거 섀도우 아닌데? 나 울었는데?"라고 하니 이모가 나를 질질질 방으로 끌고 갔다. 그러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 이모는 항상 나의 퇴사에 적극 찬성하던 사람이었다.

"나는 38살에 회사를 그만뒀는데, 더 일찍 그만둘걸 항상 후회했어 얘. 너는 얼마나 좋니 이 꽃다운 나이에?"

"이모 인생 아니라고 막말하지 마"라고 나는 내 지지자에게 항상 쓴소리를 했다.

그러면서 걱정거리를 내놓았다. 퇴사하고 나서 돈이 다 떨어지면 어떻게 하냐, 직장을 못 찾으면 어떻게 하냐, 등등..


 지금 생각해보면 결심했다고는 하지만 결심한 게 아니었다.

퇴사는 하고 싶지만 결정은 못 하겠고, 아마도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고 싶어서 부모님께 퇴사 의견을 물어보고, 안된다는 의견이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부모님 덕에 퇴사를 못한다는 그런 찌질한 짓을 했다.



 나는 의미 부여하는 걸 굉장히 좋아한다. 미신도 잘 믿고, 신년운세, 심리 테스트는 정말 좋아한다.

회사가 끝나고 버스를 기다리는 데 "제이레빗"의 요즘 너 말야 를 듣게 되었다.

'쉬운 일은 아닐 거야, 어린이 된다는 거 말야' 이 가사가 나를 울렸다. 나는 "애어른"이었다. 어른인 척하지만 어른은 아닌 아기였다. 그래 이런 모든 결정이 다 쉬운 일은 아니지, 직장을 그만둔다는 거, 안정적인 생활에 벗어난다는 것 다 어떻게 보면 나에게는 도전이었던 것이다. 처음으로 내가 나를 이해해 줬다.

그렇게 내가 내 마음을 읽어주기 시작하니 퇴사는 수월했다. 내가 왜 찌질한 짓을 시작했는지부터, 왜 부모님의 결정에 그렇게 무너졌는지 까지를 다 이해했다. 그리고 회사에 퇴사를 전하고, 여행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여행 계획을 세우는 내내 얼마나 가슴이 떨리고 신이 났는지, 내 인생에서 이렇게 가슴 떨리게 무언가를 해본 적이 있는지에 대해 의문감이 듦과 동시에 신이 났다.

동남아 지도를 프린트해서 방에 붙여놓고 디데이 카운트만 세기 시작했다.



 역시 나는 찌질했다.

 여행 떠나기 하루 전날, 급 불안감이 밀려왔다.

옆에 있는 동생들 (18살, 19살 애기들)을 붙잡고 "나 정말 여행 가야 되는 걸까? 내가 왜 여행을 간다고 했을까?"부터 시작해서 여행 가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급 밀려왔다.

기분 좋게 싸 놓은 배낭이 꼴 보기 싫어지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그냥 "무서웠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도전한 것이다. 내 성격상 퇴사 결정한 것도 정말 큰 도전을 한 건데, 거기에 여행까지, 아니 배낭여행까지 한다고 했으니 이 찌질이가 얼마나 걱정이 되었겠는가.

"아따 언니, 언니는 어차피 여행하는 거 좋아하잖아. 베트남 가서 맛있는 거 먹고 언니 좋아하는 네일아트 받고 그렇게 놀아부러~~"라는 동생에 말에 이것저것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며 '여행을 떠나야 하지 않아야 되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다 보니 열두 시가 되었다. 바로 그날, 디데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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