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그라나다
누군가 나에게 인생 최악의 도시를 꼽으라면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다.
“제 인생 최악의 도시요? 고민할 것도 없이 그라나다죠. 온갖 안 좋은 일들이 어떻게 하면 다 그곳에서만 일어나던지. 제 인생에 다시는 그라나다를 갈 일은 없을 거예요. 그라나다는, 절대요.”
그라나다에 도착한 첫날, 우리가 숙소에 다시 돌아온 건 늦은 밤이었다. 야경을 보겠다고 전망대까지 올라갔다가 오느라 온몸이 찝찝했다. 먼저 씻기로 한 나는 간단한 세면도구와 옷가지들을 챙겨 화장실로 향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들려오는 개비의 다급한 목소리에 다시 밖으로 나와야만 했다.
“화장지 챙겨서 얼른 나와봐!”
무슨 일인가 싶어 허겁지겁 나와 보니 아직 열리지 않은 개비의 캐리어 위로 벌레 한 마리가 떡하니 기어 다니는 게 아닌가. 들고 있던 화장지로 황급히 벌레를 잡았으나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우리는 떨리는 손으로 구글에 한 단어를 검색했다.
‘Bedbug’
몇 년 전, 부다페스트에서 프라하로 가는 야간열차에서 베드버그에 물린 적이 있다. 프라하에 도착해 샤워하던 중 베드버그에 물린 자국을 발견하고 어찌나 놀랐던지. 그때 기억을 떠올리면 아직도 팔에 소름이 쭈뼛 선다.
“으, 나도 베드버그에 물려봐서 알아. 당장 침대 시트를 바꿔줄게. 베드버그는 잘 안 죽으니까 빨래는 꼭 고온에서 돌리도록 해.”
호스텔 스태프의 배려로 침대 시트를 바꾸고, 가지고 있던 짐들을 깨끗이 빨기까지 했음에도 안심할 수 없었던 나는 한국에 도착해서도 짐들을 다 손빨래하겠다며 난리를 피웠더랬다.
이번에는 아닐 거라 애써 부정해보았지만, 우리의 불안감은 현실이 됐다. 눈을 비비며 다시 보아도 우리가 잡은 벌레의 생김새는 구글에 뜨는 수백 장의 베드버그 사진과 매우 흡사했다.
우리가 잡았던 그 벌레는 베드버그였다.
순응은 빨랐다. 우리는 프론트에 적혀 있던 보스의 연락처로 황급히 연락했고(우리가 묵던 호스텔은 24시간 리셉션이 아니었다) 잠시 후 우리의 메일을 확인한 호스텔 보스가 각종 벌레퇴치 약을 든 채 나타났다.
그녀는 방을 둘러보고 약 냄새가 빠질 때까지 몇 시간은 기다려야 할 것이라며 웃어 보였다. 웃는 낯임에도 그녀의 첫인상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너희가 베드버그를 데리고 온 것일 수도 있다며 은근슬쩍 책임을 전가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우리와 같은 방에 묵던 다른 투숙객들에게는 그 어떤 의심도 하지 않았으면서 말이다.
“방을 살펴볼 동안 1층에서 기다려줘.”
“그런데 혹시 방을 바꿀 수는 없을까?”
“지금 풀부킹이라 방을 바꿔줄 수는 없어. 그냥 여기서 자야 해.”
기대를 안고 물어보았으나 돌아오는 그녀의 말은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약을 치고 나온 그녀가 이 방에 베드버그는 더 없는 것 같다며 우리를 안심시켰지만 불안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맙소사, 베드버그가 나왔던 방에서 다시 자야 한다니…. 다른 방은 이미 예약이 다 차 있다는데 무작정 방을 바꿔 달라며 떼를 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 새벽에 다른 숙소로 옮기는 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 내일 빨래하고 짐 구석구석 살펴보면 이 찝찝한 마음도 좀 괜찮아질 거야. 호스텔 보스도 베드버그는 더 없는 것 같다고 했으니까 일단 안심하자.’
선택지가 많지 않았던 우리는 결국, 베드버그가 나왔던 그 방에서 불을 켠 채 뜬눈으로 잠들 수밖에 없었다. 내일은 이 찝찝한 마음이 조금은 사그라들 것이라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