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난중일기
결혼 전에는 아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를 등에 업고 남 앞에서 유난을 떨어대는 어미들 꼴이 보기 싫었지요. 제 인생에 아이가 등장하는 순간, 갑자기 제 삶도 그렇게 아귀가 맞지 않는 채로 삐그덕거릴 것만 같아서 겁이 났었나 봐요. 이십여 년간 부모에게서 키워짐을 당하다가 이제 겨우 두 다리로 섰는데 다시금 그런 관계의 굴레를 재생산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반갑지 않았습니다.
맹랑한 제 잇속에 하느님이 노하셨던지 결혼 뒤에 한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목구멍에 설움이 꽉 들어찰 만큼 날마다 아이 생각이 간절해졌을 때 드디어 한 생명이 기적처럼 저에게 왔습니다. 어렵게 생긴 아이를 키우면서 비로소 실감했어요. 하나의 생명이 제 구실을 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인간의 공력이 투입되어야 하는지를.
살아있는 모든 것이 새롭게 보였습니다. 놀이터에서 콧물 질질 흘리며 흙장난하는 동네 아이들도 예전처럼 심상하게 보아 넘겨지지 않았어요. 아이들은 물론, 그 부모도 제가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의 어마어마한 시간과 감정을 거름 삼아 한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에 경외감이 들었습니다. 생명에 대한 엄중한 깨달음이었지요.
그런 겸손함을 느낄 만큼 아이를 낳아 오롯이 제 손으로 키우는 게 힘에 부쳤습니다. 실시간으로 결정하고, 대답하고, 돌봐주고, 상처받을 일이 끝도 없이 생겨났어요. 마음의 반을 어디다 줘 버리고 나면 이 주체하기 어려운 감정 노동에서 조금쯤 헤어날 수 있지 않을까 꿈을 꿔본 적도 있습니다. 영상을 돌려보기라도 하듯이 부모가 하던 대로 되풀이하는 자신을 보면서 가족이란 이름의 수레바퀴를 실감하기도 했고요. 그런 과정에서 저는 사랑이라는 것을 형벌처럼, 빚처럼, 상처처럼, 아픔처럼 다양한 모습으로 맛보면서 신의 섭리를 조금씩 깨닫곤 했습니다.
지난 밤, 얼큰하게 취한 남편은 집 앞 편의점에 들러 맥주 세 캔을 사들고 왔습니다. 하나는 자신, 하나는 아내, 또 하나는 대학 졸업반인 딸을 위해서요. 한 잔 하자면서 우리를 식탁으로 불러 모았습니다. 평상시 우리 집 식탁은 음식을 빌미로 둘러앉아 까칠한 설전을 벌이는 곳입니다. 밥 먹으며 떠드는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상대의 논리가 조금 부족하다 싶으면 여지없이 반론으로 받아치는 바람에 맥없이 당한 입장에서는 약이 올라 꽥꽥대기도 하지요. 남의 말을 대충 들어 넘기는 사람이 없어 예민한 주제에 관해서는 더 야단법석입니다. 화기애애는 고사하고 당장 내일이라도 헤어질 사람처럼 치열한 갑론을박에 빠져듭니다. 흡사 밥 먹으면서 하는 토론대회장 같아요. 그런 우리도 가뭄에 콩 나듯 진지하면서도 훈훈한 대화를 나눌 때가 있습니다. 어제가 바로 그랬습니다.
딸애는 이제 대학교 4학년, 앞길이 창창한 청춘입니다. 그런데 취직 대신 자기만의 작업을 시작하고 싶은가 봅니다. 하지만 분명한 길이 보이지도 않아서 부모에게 당당하게 주장하기도 어려운 기색입니다. 뭐라 설명하기도 어려운 애매모호한 길을 가겠다면 어느 부모인들 반갑겠습니까. 삶이 치열하다고 느끼는 만큼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만 집중하는 아이가 대책 없이 낭만적으로 보여서 한숨이 나지요. 아이도 이제껏 키워준 부모에게 그런 일들이 얼마나 걱정스러울까 싶으니 마음속으로 내내 갈등했을 겁니다. 부모에 대한 배려가 깊은 아이일수록 그런 고민은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자식들의 정신적 고뇌도 대부분 이런 데서 비롯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가장 좋은 부모는 자식 마음에 똬리를 틀지 않는다고 합니다만, 부모 역시 투명인간이 아닌 바에야 그런 경지에까지 이르기는 어렵겠지요.
어려서부터 어른스러운 데가 있고 섬세한 감각을 지닌 딸아이는 이런 부분에서 많이 시달리며 자랐습니다. ‘세상에 죽을 만큼 노력하면 못 이룰 것 없다’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초강력 입김도 작용하는 데다가 그들에게서 키워진 부모의 가치관도 녹록한 지경은 아니었어요. 외면하자니 배신이요, 얌전히 따르자니 자기기만이 되어버리는 묘한 갈림길에서 얼마나 외롭고 고민이 많이 되었을까요?
그런 분위기를 얼마 전부터 감지한 남편이 급기야 맥주 세 캔을 사들고 와서 어렵게 말문을 연 것입니다. 남편은 어떤 자식이었나, 저는 또 어떤 고집쟁이였나 생각해보면 딱히 할 말도 없습니다. 기로에 설 때마다 부모님의 희망 사항보다는 자기 생각과 주장대로 최종선택을 하면서 살아왔으니까요. 부모님의 진액을 최대한 빨아먹고 컸으되 ‘그래, 내가 졌다. 니들이 더 잘났다.’로 항복까지 받아가면서, 사사건건 부모의 권장사항을 외면했고 제가 끌리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 왔습니다. 그러는 동안 그분들께 드린 걱정과 아픔은 또 얼마인지요. 돌아가시고 나면 그런 불효가 천추의 한이 될까 봐 머리가 허옇게 된 지금에 와서야 뒤늦게 눈곱만큼씩 효도하는 척하는 사람들이랍니다.
그런데 우리 아이 눈에는 저희가 전통와 예절을 받들며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순종적으로 살아온 것처럼 보이나 봅니다. 할아버지 세대나 아버지 세대나 똑같이 ‘고리타분’하다는 점에서 초록은 동색처럼 느껴지겠지요.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 고리타분도 엄연히 세월 따라 단계가 있고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끼리는 또 그 고리타분의 질과 양이 엄청나게 다릅니다. 그 세세한 갈등의 역사, 즉 속박하는 자와 반항하는 자의 역동관계를 굳이 뒤적일 필요야 없겠지만 결국은 지금과 똑같은 세대 간의 갈등과 가치관의 충돌이 분명히 존재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전쟁 같았던 세월이 지난 후에 체념이 생기고 용서가 되었고 화해로 풀리면서 꽃이 피어났습니다. 그 위에 다시 아이들이 태어나 똑같은 전쟁을 되풀이하는 중이고요. 부모는 아무리 자식들이 스스로 생명을 꽃피우며 잘 자라기를 바란다고 하지만, 그 ‘꽃’과 ‘잘 자라기’에 대한 생각은 원천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완벽하게 합일될 수 없는 시대적 어긋남이 필연적으로 존재한달 수밖에요.
어느덧 공격수가 아니라 수비수가 되어버린 남편이 겨우 말문을 엽니다. 부모가 바라는 건 너 자신의 행복이니까, 그리고 너는 그걸 마음껏 찾을 권리가 있는 독립된 주체니까, 설사 부모가 못마땅하게 생각하거나 다른 길을 원한다 하더라도 쓸데없이 죄책감을 느끼고 머뭇거릴 일은 아니다. 가장 두려운 건 부모의 염려가 오히려 덫이 되어 자식들의 자유로운 기쁨을 앗아가는 일이다. 그러니 힘이 센 네 부모가 거품을 물면서 부모 생각대로 너를 끌고 가려 해도 거기에 의연히 맞서서 스스로 ‘너다움’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 부모는 결국 만나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넘어서야 하는 존재더라. 그러니 딸아, 겁내지 말고 즈려밟고 가려무나. 그래도 인정이 있거들랑 ‘사뿐히’ 말이다.
문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이 비슷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렇게 대화를 주거니 받거니, 겨울밤이 깊어갔지요. 가끔씩은 우리도 이렇게 따뜻해집니다. 빡센 부모에게 시달리며 자라온 남편의 가정환경을 고려해본다면 새삼스레 존경스러운 일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