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먹었으면 치워야지.

설거지옥에서 건져올린 생각들

by 우지경

오랫동안 매일 쓰는 물건에 무심하게 살았다. 특히 수세미, 주방세제, 고무장갑처럼 생필품에 쓰는 돈을 아까워했다. 그저 설거지가 하기 싫어서 수세미나 고무장갑에 눈길을 주지 않았던 것도 같다. 실은 집안일 중 손에 먼지가 묻는 일은 좋아하면서도 손에 물이 묻는 일을 유난히 귀찮아하는 편이다. 청소와 정리정돈은 하고 나면 쾌감이 느껴지는데, 설거지, 화장실 청소, 손빨래 같은 일을 하기도 전에 반감이 느껴진다.


결혼 전, 개수대가 꽉 찰 때까지 그릇을 잔뜩 쌓아 두었다가 그릇 탑이 무너지기 직전에 마지못해 설거지를 시작하곤 했다. 쌓이면 미루게 되는 게 설거지라는 걸 알면서도 애써 외면했다. 그때는 몰랐다. 그릇에는 제 자리가 있으며, 그릇이 개수대와 식기 건조대를 거쳐 찬장 안에 안착했을 때 설거지가 마무리된다는 것을.


때때로 설거지 양이 많을 땐 중간에 그만두기도 했다. 오늘 못다 한 설거지는 내일 하면 된다는 게 핑계였다. 수세미는 너덜너덜해져야 바꾸고, 고무장갑도 구멍이 나야 새로 샀다. 생필품의 생의 주기에도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내가 결혼을 하자 상상도 못 했던 ‘설거지옥’이 열렸다. 시댁에서 상을 차리고 난 후 설거지는 결혼 전 미루고 또 미룬 설거지 양과는 비교도 안 되게 많았다.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린 음식은 온 가족이 먹었는데, 설거지는 며느리의 몫이었다.


시어머니는 아들에겐 설거지는커녕 상조차 못 들게 했다. 남자가 부엌에 들어오는 게 아니라는 게 이유였다. ‘부엌이 여성 전용 사우나도 아닌데 대체 왜요?’라고 묻지는 못했다. 그저 나는 거친 손길로 기름진 그릇을 닦고, 남편은 불안한 눈빛으로 내 뒷모습을 바라보고, 시어머니는 그 모든 걸 지켜보았다.


남편과 둘이서도 종종 설거지를 둘러싼 둘러싼 분쟁(?)을 벌였다.

“설거지는 자기가 해.”

“알았어. 좀 있다 할게.”

나는 밥을 얻어먹는 사람이 설거지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남편은 반박하진 않았지만 먼저 설거지를 하겠다고 나서지도 않았다. 매번 ‘좀 있다 할게.’라는 말로 시간을 벌었다.


남편은 식사 후 설거지를 바로 하지 않아서 그렇지, 막상 하면 그릇이 뽀드득하게 잘했다. 설거지하는 동안 물이 튀는 것을 싫어해 샤워형 물줄기를 쓰지 않고, 설거지할 때마다 개수대까지 닦는 등 나름의 규칙도 있었다. 반면 나는 샤워형 물줄기를 써서 물을 튀기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달라졌다. 10년 살던 아파트를 인테리어를 하며 주방을 ㄷ자로 바꿨더니 자꾸 집에 일찍 와서 파스타 면을 삶고 스테이크를 굽기 시작했다. 때 마침 나라에서도 ‘저녁이 있는 삶.’을 장려했다. 점점 남편이 요리에 재미를 붙일수록 내가 설거지할 일도 늘었다. 얻어먹은 사람이 설거지를 해야 한다고 늘 주장해온 내가 요리와 설거지를 다 남편에게 맡기는 건 양심에 찔렸다.


두 팔 걷어붙이고 설거지 환경 개선에 뛰어들었다. 냄비에 주로 쓰는 18-8 스테인리스 소재로 만들어 물과 녹 자국에 강하다는 라 바제 식기 건조대를 부엌에 들였다. 이런 소재와 디자인 덕에 식기 건조대 계의 샤넬이라 불린다나 뭐라나. 설거지 후 라 바제 식기 건조기에 그릇 착착 올리면 그릇의 물기가 건조대 아래 경사를 준 받침대에 또르르 떨어져 개수대로 흘러갔다. 식기 건조대까지 힘주어 장만했는데도 뭔가 거슬렸다.


시뻘건 고추장 색 고무장갑과 보색 대비를 이루는 초록색 수세미가 문제인 듯했다. 아직도 빨간색이 아니면 핫핑크색 고무장갑이 대세라니. 아무리 빨간 양념을 많이 쓰는 한국인의 식습관에 맞춘 색이라 해도 이제는 바뀔 때가 되지 않았느냔 말이지. 그때부터 나는 눈의 피로를 덜어줄 은은한 색의 고무장갑을 찾아 나섰다. 마트에 갔다가 회색이나 베이지색 고무장갑이 보이면 몇 개씩 사서 싱크대 하부장에 쟁여 두었다. 수세미도 회색이나 흰색이 보이면 여러 개 샀다. 그렇게 싱크대 주변 물건들의 색을 바꾸고 나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이런 게 컬러 테라피인가 싶었다. 그 덕에 설거지를 방치하는 시간이 줄었다고 생각했다. 한 주방세제를 만나기 전까지는.


이런저런 세제를 써보다가 사각의 모던한 패키지와 화이트 톤의 색이 돋보이는 주방 세제를 하나 알게 됐다. 가격 대비 디자인이 괜찮다 싶어 샀는데, 세제에 쓰인 카피 한 줄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여보, 먹었으면 치워야지!”


그때 깨달았다. 설거지라는 끝없는 집안일의 든든한 동반자는 회색 고무장갑이나 수세미가 아니라 마인드라는 것을. 밥을 얻어먹은 사람이 설거지를 한다는 마인드. 마인드를 돈으로 살 순 없으니 나는 오늘도 내 돈으로 산 주방세제를 쓰며 설거지는 남녀불문하고 밥을 차리지 않은 사람이 하는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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