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좋아지는 일력
나는 침대에서 책상으로 출근한다.
책상이 놓인 서재로 가기 전, 부엌에 들러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 테이크 아웃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9년째 쭉 집에서 일해온 프로 재택근무러답게 침대에서 책상까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동하는 게 포인트다.
책상에 도착하면 엄지와 집게손가락에 힘을 주어 착 소리가 나게 일력부터 뜯어낸다.
얇은 종이가 손가락 끝에 닿는 미세한 감각에 느끼며 오늘이 몇 월 며칠인지 머릿속에 날짜를 타닥타닥 새겨서 저장한다. 그렇게 의식을 치르듯 일력을 한 장을 넘겨야 비로소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는 것 같다.
비록 어제는 이런저런 상황에 떠밀려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날을 보냈더라도, 오늘은 나를 위한 시간으로 하루를 차곡차곡 채우게 될 것 같은 예감마저 든다.
그런 다음 한결 차분해진 마음으로 노트북 전원을 켠다. 그 사이 입에 커피 한 모금을 머금고 투두 리스트를 적어 내려간다. 매일 아침 투두 리스트 쓰기는 네이밍 회사 신입 시절부터 지켜온 오랜 습관이다. 네이미스트에서 브랜드 홍보 담당으로, 브랜드 홍보 담당에서 여행작가로 직업을 크게 3번 바꾸는 동안 한결같이 투두 리스트를 썼다.
반면, 일력 넘기기는 프리랜서가 된 후 새롭게 들인 습관이다. 프리랜서 여행작가로 일하며 출퇴근 시간이 따로 없다 보니 점점 요일 감각이 무뎌지는 듯했다. 일주일 이상 해외 출장을 다녀오면 시차 적응만 못 하는 게 아니라 날짜 개념도 흐려지곤 했다.
일이 몰릴 땐 밤을 새워 일하고, 마감을 끝내고 나면 느지막이 일어나는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뒤를 돌아보니, 아뿔싸 날짜와 요일 감각이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아무도 뭐라고 하진 않았지만 내 소중한 시간을 한 뭉텅뭉텅 잃어버린 것 같아 억울했다.
그래서 일력을 샀다. 하루를 잘 지내려면 오늘이 며칠인지 알고 시작해야겠다는 마음에서였다. 일력을 쓰면서 잃어버린 날짜와 요일 감각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저 일력을 쓸 뿐인데 매일 아침 내 마음이 삶의 속도를 따라오고 있는지 챙길 수도 마음이 너무 느슨해지지 않았는지 다잡을 수도 있었다.
3년째 쓰고 있는 일력은 가로 60mm 세로 85mm의 라이프워크 미니 일력이다. 작아서 책상 위에 두어도 자리를 많이 차지하지 않는 쁘띠 일력이라고나 할까. 사이즈는 작지만 일, 요일, 월(크기 순서)은 볼드체로 큼직하게 쓰여 있다. 게다가 달이 바뀔 땐 멋진 문구가 짠 하고 영어로 나타나 글로벌하게(?) 마음을 다지며 새 달을 시작하는 재미가 있다. 이를테면 1월은 'Begin Again.', 2월은 'Be Your Own Light.'라는 문구와 함께 시작하는 식이다.
바야흐로 달력이 쏟아지는 연말을 맞아 2021년에는 어떤 일력을 써볼까 행복한 고민 중이다. 마침 ‘자기만의 방’이란 출판사에 김신지 작가 임진아 작가와 일력을 선보였다는 소식에 마음이 들썩인다. 하나는 ‘오늘의 할 일력’이고 또 하나는 ‘오늘이 좋아지는 일력’인데 일력을 뜯으면 나오는 그날의 문장을 읽고 그림을 보며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니 둘 중 뭘 사야 하나 망설여진다.
아무래도 둘 다 사서 하나는 내가 갖고, 또 하나는 내년도 하루하루 잘 지내길 응원하고픈 후배 설선에게 선물해야겠다. 마침 후배의 생일이 연말이니 이보다 좋은 핑계가 또 있을까. 한때 같은 사무실 같은 책상에 앉아 일하던 설선이와 다른 공간에서 매일 일력을 넘기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벌써 흐뭇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