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파가 있는 곳이 거실이다!
“공간의 역할을 부여하라. 한 공간이 한 가지 역할을 맡으면 훨씬 아늑하고 넓어 보인다.”
<신박한 정리>에서 맹활약 중인 이지영 공간 크리에이터 말로, 무척 공감이 간다. 주방, 큰방, 작은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면 죽어가던 공간도 살릴 수 있다는 희망을 주기 때문이다. 그가 방송에서 의뢰인의 라이프스타일에 맞춰 사물을 재배치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짜릿함을 느낀다. 내 집이 바뀐 것도 아닌데 쾌감을 느끼는 이유는 ‘콜럼버스의 달걀’ 만큼이나 편견을 뒤집어 주는 발상의 전환을 끌어내기 덕분이다. 그런데 , 이지영 공간 크리에이터를 알기 오래전 나는 이런 고민에 부딪혔다.
“신혼집이 투 룸 빌라인데 소파를 두고 싶어요!”
결혼하면 갖고 싶었던 공간이 오븐이 있는 주방이 아니라 책장과 책상이 있는 서재, 소파와 TV가 있는 거실이었던 나는 투 룸 빌라를 보고 온 날부터 생각이 많아졌다. 고민 끝에 책상은 식탁으로 대신하고 책장은 책을 적게 사서 책장 없이 살더라도 두 다리 쭉 뻗고 누워 TV를 볼 수 있는 소파만은 포기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노트에 신혼집의 도면을 그려 놓고 소파를 어디에 둘 까 궁리했다. 그때 이런 말이 떠올랐다.
“소파는 거실에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라. 소파가 있는 곳이 거실이다.”
또 다른 유명 공간 크리에이터가 한 말이 아니라, 18평 남짓 되는 투 룸 빌라에 어떻게 거실을 만들까 봐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던 나의 혼잣말이다. ‘안 되면 되게 하자.’는 마음으로 투 룸 빌라 내 모든 공간의 가능성을 열어 두고 소파 배치 시뮬레이션을 해보았다.
1 주방
이미 싱크대가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고 식탁도 벽에 붙여야 겨우 둘 수 있으니 패스.
2. 큰 방
가장 넓은 벽면은 붙박이 장이 차지하고 있고 반대쪽 벽에 침대를 두어야 하니 패스.
3. 화장실
소파를 세로로 세워도 들어가기 힘들어서 탈락.
4. 작은 방
현관 옆 작은 방은 모양이 길고 좁아 창문 아래 소파를 두고 반대쪽 벽에 TV를 두면 얼핏 보면 시네마 룸이
될 수도 있으니 예스!
작은 방을 줄 자로 재어 보니 2~3인용 소파 하나는 들어갈 수 있는 사이즈였다. 역시, 소파가 있는 곳이 거실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마음에 드는 색과 디자인의 소파를 고르기만 하면 되겠군. 안도의 한숨을 쉬자 남자 친구가 말했다.
“TV랑 소파는 내 마음에 드는 걸로 고르고 싶어.”
그래, 그럼 TV부터 사고 소파를 사이좋게 골라볼까?라고 생각했다. 콧노래를 부르며 TV를 사러 하이마트에 갔더니 TV가 품절이라고 했다. 이마트, 홈플러스 등 가는 곳마다 TV가 동이 났다고 난리였다. 때는 2004년 월드컵이 한창이었다. 다들 월드컵 보려고 TV를 바꾼다는 것이었다. 발에 땀이 나게 발품을 판 끝에 TV를 샀다. 그것도 1~2주 대기로 겨우. 그런데, 대체 왜 가전을 오프라인에서 사냐고? 다시 말해 그때는 2004년 쿠팡도 네이버 쇼핑도 없던 시절이었다.
자, 이젠 작은 방 사이즈에 맞는 소파를 고를 차례. 나와 남자 친구는 패브릭 소파로는 의견을 모으는 가 싶었는데 소파 색에서 극명하게 대립했다. 나는 밝고 화사한 색, 남자 친구는 어두운 색이 좋다고 했다. 결국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진 못했지만, 카키와 그레이의 중간쯤 칙칙한 색의 소파로 타협을 봤다.
“자 그럼 소파 앞에 둘 테이블을 골라 볼까?.”
지경아, 테이블이라니. 남자 친구는 안 그래도 좁은 방에 소파와 TV를 두면 꽉 차는데 무슨 테이블이냐며 말렸다. 차라리 상을 사서 접었다 폈다 하라고. 하지만 나는 꿋꿋하게 친구와 가족들이 놀러 와도 빙 둘러앉기 좋은 다크 브라운색 6인용(?) 커피 테이블을 골랐다. 비슷한 톤의 바퀴 달린 tv장도 사고, 거실의 분위기를 완성해 줄 러그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러그는 무슨 러그냐는 남자 친구의 공격이 들어왔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당시 한일카펫에서 일하던 친구의 도움을 받아 모던한 러그를 작은 방에 무사히 깔 수 있었다. (혜랑아, 고마워. 네가 선물해 준 그 러그 지금은 내 서재에서 잘 쓰고 있어.) 내가 작은 방에 거실이라는 역할을 부여했을 때, 작은 방은 내게로 와 아늑하고 다정한 거실이 되어 주었다.
'거실은 완성. 자 이제 식탁과 침대 화장대 등 주방 거실 가구를 내 취향대로 골라 볼까?'
다시 콧노래를 부르려는 찰나 엄마를 통해 아빠의 지령이 도착했다. 아빠 친구의 아내 분이 부산에서 보르네오 대리점을 하고 있으니 앞으로 모든 가구는 몽땅 보르네오에서 사라는 것이다. 나는 가구를 고르기 위해 KTX를 타고 부산으로 갔다. 다시 말하지만 한국에 이케아도 마켓 비도 오늘의 집도 없던 2004년의 일이다. 보르네오 대리점에서도 흰색 가구만 고르던 나는 '흰색 식탁은 때가 타서 안된다. 흰색 프레임의 침대도 오래 쓰면 질린다.'는 엄마의 말에 따라 결국 온통 다크 브라운 색 식탁과 침대 화장대를 주문하고 말았다. 휴.
가구의 산을 넘었으니 가전은 내 마음에 드는 것으로 장만하리라. 의지를 불끈 다졌건만 이번엔 사이즈가 문제였다. 주방은 식기 세척기 놓을 자리는 고사하고 냉장고 놓을 자리가 없어 양문형 냉장고 중 가장 작은 사이즈를 샀다. 세탁기를 놓을 베란다도 좁아서 드럼 세탁기 중 가장 작은 사이즈를 골라야 했다. 주문한 가전을 배송받던 날, 배송 기사님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사이즈는 쟤 보고 주문한 게 맞냐고 몇 번을 되물으셨다. 그렇다고 대답하면서도 불안했다. 혹시 내가 사이즈를 잘 못 쟀으면 어쩌나. 내가 생각해도 4층까지 계단으로 냉장고를 이고 지고 왔는데 저 자리에 안 들어간다면 던져 버리고 싶을 것 같은데. 다행히 가전은 테트리스 게임하듯 자리에 쏙 끼워졌고 아저씨는 두 손 가볍게 계단을 내려가셨다.
"그런데, 김치 냉장고는 왜 안 사니?"
며칠 후 남자 친구를 통해 예비 시어머니의 불만을 접수했다. 김치 냉장고라니요. 어머니. 냉장고도 겨우 넣었는데 김치냉장고는 벽에 걸까요? 아니면 천장에 달까요?라고 답변을 전송하지는 못하고 남자 친구와 격하게 다퉜다.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이유들로 몇 번 더 싸우다 보니 거실은 없어도 소파는 있는 신혼집 인테리어가 완성되어 있었다.
지금도 신혼집을 떠올리면 기억나는 것은 거실에서 보낸 시간들이다. 하루의 끝 소파에 몸을 파묻고 앉아 우대리가 아니라 우지경으로 돌아오던 시간. 남편과 나란히 모로 누워 TV를 보던 여유. 좁은 집에 친구들을 불러 집들이를 하던 날들은 잊히지 않는 추억으로 남아있다. 아. 작은 방 거실 말고도 잊을 수 없는 날이 하루 있긴 하다. 예고도 없이 찾아왔던 그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