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코패스 비긴즈

체리색 문을 피하고 싶어서...

by 우지경

사이코패스는 타고나는 것일까, 만들어지는 것일까. 전문가들은 사이코패스는 선천적이 영향과 후천적 영향을 다 받는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화이코 패스(화이트와 사이코패스를 조합한 신조어)는 타고 나는 걸까, 만들어지는 걸까?


화이코패스 테스트가 있다면 10점 만점에 10점을 받을 자신이 있는 나는 감히 대답할 수 있다. 화이코패스는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연두색과 체리색 몰딩 집을 전전하며 전세를 살 다 보면 안 그래도 좁은 집 문과 몰딩은 왜 이리 튀는 색으로 했을까 원망하게 되고, 내 집을 사면 기필코 몰딩을 새하얗게 바꾸리라 결심하는 것이 화이코패스의 시작이라고 말이다. 물론 멋스러운 가구와 소품으로 체리색 몰딩을 극복하는 방법도 있고, 아예 몰딩 색에 맞춰 인테리어 계획을 세울 수도 있다. 그렇게 현명한 사람이라면 나 같은 화이코패스는 되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웬 화이코패스 타령인고 하니, 내 집 마련의 고민이 생각보다 빨리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이사 갈 거라면 이번엔 집을 사자.라는 남편의 제안은 거창했지만 선택지는 단출했다. 분당선 야탑역 접근성이 좋은 서울 시내의 아파트는 강남구, 서초구, 송파구에 많았지만, 우리의 전 재산을 탈탈 털어 넘볼 수 있은 지역은 관악구가 유일했다. 벚꽃이 바람이 날리던 봄날 남편과 나는 봉천동 아파트 투어에 나섰다. 여길 보아도 언덕, 저길 보아도 언덕 언덕 투성이 봉천동의 아파트 중 언덕 위의 대단지 푸르지오 아파트를 골랐다. 그리곤 가진 돈의 두배 이상 대출을 받았다. 그때 내 나이 딱 서른 30년 상환 모기지론이라니 죽기 전에는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부터 새로운 고민이 시작됐다. 내 집 인테리어! 월세도 전세도 아니고 내 집이니 아름답게 꾸미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돈이 없었다. 대출받은 돈에서 집 값 치르고 세금 내고 부동산 중개비 내고 남는 돈 500만 원으로 인테리어를 하기로 했다. 난생처음 대출을 받는 남편과 나에겐 억 단위는 화성에 갈 우주선을 발사하는 것만큼이나 엄청난 돈이었기에 인테리어에 돈을 더 쓰겠다는 엄두는 차마 내지 못 했다.


도배와 장판 교체는 필수였고, 체리색 몰딩 퇴치는 불가결의 조건이었다. 마침 건축 설계사무소에서 야근을 밥 먹듯 하던 친구가 몰딩과 문을 교체해주겠다고 발을 벗고 나섰다. 친구 덕에 화이트 몰딩의 꿈이 드디어 이루어지는구나 싶었다. 친구는 현장 경험은 없었지만, 아는 전문가를 섭외해 천장 몰딩과 걸레받이를 화이트로 착착 교체하고, 체리색 문 틀을 화이트로 랩핑해 주었다. 이제 체리색 문 만 바꿔 달면 된다고 했다.


도배를 맡은 아저씨 아주머니는 새댁이 뭘 몰라서 이렇게 집을 허옇게 바꾼다고 혀를 찼지만 나는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문이 도착하기 전 까지는 그랬다.


"일반적인 아파트 문 사이즈 아니라고요?"

백설기처럼 흰 문이 도착한 날 문짝 사이즈가 맞지 않아 모두 당황했다. 문짝을 싣고 온 아저씨는 아저씨대로 문짝을 주문한 연실이는 연실이 대로 당황해서 언성을 높였고 나는 눈물이 찔끔 날 것 같았다.


"걱정하지 마. 문은 다시 발주하면 돼."라는 친구의 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음 날, 친구는 이 사이즈의 문은 별도 제작을 해야 하니 돈이 너무 많이 든다고 했다. 그럼 어떻게 하냐고 묻는 내게 친구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했다.


"차라리 래핑을 하자. 내가 래핑 전문가를 보내줄게. 언제가 좋아?"

딩동. 이삿짐 정리는 어느 정도 마친 주말 아침 엄마가 차려준 따끈한 밥을 한 술 뜨려는 찰나 벨 소리가 들렸다. 엄마는 딸 이사를 돕겠다고 부산에서 서울까지 와 있을 때였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전문가였다. 재료를 가지고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는 모습이 어찌나 믿음직스럽던지. 드디어 체리색 문이 마법처럼 흰 문으로 변신하겠구나. 기대에 가득 찬 눈길로 바라보는 내게 전문가 분이 말했다.

“아, 이 문은 너무 틈이 너무 많아서 안 되겠어요.”

"네? 그냥 해주시면 안 될까요?"

"제 실력으로는 안돼요. 더 잘하는 분이 오셔야 돼요."


“지경아, 이 조합도 예쁘다. 문은 체리색, 문틀은 흰색. 이렇게 살면 어떠냐.”

망연자실하는 내게 엄마가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네 장모님 저도 좋은데요.”

나의 화이트 타령에 지친 남편이 엄마 편을 들고 나섰다. 그럴 거면 체리색으로 그냥 뒀지.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나를 도와주려다 고생길에 들어선 친구 연실이는 더 잘하는 전문가를 수배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 며칠이 얼마나 길었던지. 퇴근 후 화이트 몰딩에 낀 체리색 문을 볼 때마다 슬퍼하며 다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 문을 흰색으로 바꾸고 말리라. 그렇게 나는 화이코패스가 되어 갔다. 화이코패스의 꿈은 친구가 래핑 전문가 중 어떤 래핑도 다 해내는 래핑의 달인을 모시고 집에 모시고 온 날 거짓말처럼 이루어졌다. 전문가의 손끝에서 체리색 문은 틈 많은 화이트색 문으로 다시 태어났다. 나는 그 문을 바라볼 때마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다짐했다. 꿈 하나 이루었으니 행복하게 잘 살아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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