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코 패스도 벽지 색은 고민합니다.
체리색 몰딩을 싫어한다고 해서 벽에 아무 색도 없는 하얀 집을 이상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벽지를 고르는 일이 쉽지 않을 뿐이다. 기본적으로 화이트가 좋은데, 침실이나 서재에 포인트 벽지를 바르겠다고 마음먹는다면 더욱더 심사숙고하게 된다. 책의 표지가 책이 입은 옷이라면, 집이 입은 옷과 같아서 조화로운 색을 고르지 않으면 눈과 마음에 부담이 될 것을 알기에 이 색의 벽지를 고르면 곧 질려버릴까 봐 지레 겁이 난다.
“어떤 색 벽지를 하고 싶어?”
처음 내 집(엄밀히 말하면 남편과 나의 공동명의 아파트)을 샀을 때 체리색 몰딩 퇴치를 도와주기로 한 친구에게 이 질문을 받고 웨딩드레스를 보러 갔을 때만큼 당황했다. 마치 난생처음 “신부님 어떤 스타일의 드레스를 입고 싶으세요?”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처럼 침묵했다. 그때 그저 이 남자랑 결혼해서 재미있게 살고 싶다는 생각만 했을 뿐 결혼식에 어떤 드레스를 입겠다고 생각해보지 않았음을 깨달았듯이, 그저 내 집(전세 말고 자가)이 생기면 도배를 해야지 했을 뿐 어떤 색과 톤의 벽지를 택할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전셋집이 아닌 내 벽지를 골라야 하는데 ‘거실은 화이트’ 외엔 침실도 서재도 딱히 어떤 색 벽지를 하고 싶은지 떠오르지 않았다.
한마디로 레퍼런스가 없었다. 그래서 급하게 라이프스타일 잡지를 뒤졌다. (오늘의 집과 집 꾸미기 인스타그램이 없던 시절이었다.) 레퍼런스를 보다 보니 남편과 공용 서재로 쓸 방의 벽은 어쩐지 연두색 또는 녹색 톤을 하고 싶었다. 그때부터 빈티지한 서재에 대한 로망이 있었던 모양이다. 침실은 조금 더 과감하게 해 볼까 하는 마음이 삐죽 고개를 들었다. 결국 서재는 은은한 연두색 실크 벽지를 사방에 두르고, 침실은 한쪽 벽에만 약간 톤 다운된 레드 실크 벽지를 포인트로 하기로 했다.
“어쩌죠? 작은방용 연두색 벽지가 생산이 안 된대요. 다른 걸로 골라야겠어요.”
도배하기 전날 이런 전화를 받았다. 나는 야탑역 IT회사, 남편은 서부이촌동 광고회사에 근무하던 평일 오후였다. 남편에게 다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집 앞까지 달려가서 벽지를 다시 고르는 것보다 남편이 달려가서 고르는 게 빠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남편은 짧고 굵게 한마디 했다. “내가 가서 고를 순 있어. 근데, 후회 안 하지?”
그 말을 듣는 순간 덜컥 겁이 났다. 100% 아니 200% 후회할 것 같았다. 연두색~녹색 벽지가 많지는 않아도 그 톤과 미묘한 차이가 큰데 남편에게 맡겼다가 두고두고 원망할까 두려워 반차를 내고 벽지를 고르러 달려갔다. 하도 남편과 전화 통화를 티 나게 해서 팀장도 그럴 거면 얼른 가서 벽지나 고르라고 화를 냈던 것도 같다. 부리나케 달려가 내가 고른 벽지는 패턴이 있는 연두색 포인트 벽지였다. 이걸 딱히 무슨 패턴이라고 표현하긴 어렵지만, 그 시절 꽤 인기 있던 벽지 증 하나였다.
다행히 침실의 벽지는 아무런 사고 없이 도배하는 날에 맞춰 도착했다. 침대 머리맡 부분만 레드를 골랐는데 짙은 호두나무 색 침대와 제법 잘 어울렸다. 깔맞춤 본능을 숨길 수 없었던 나는 포인트 벽지에 맞춰 베개, 이불 등 침구와 커튼을 맞췄다. 베개는 화이트 둘 레드 둘, 이불은 한쪽 면은 화이트 한쪽 면은 레드로 해서 살짝 접었을 때 레드가 보이게 두려고 했다. 열심히 고속터미널 혼수상가 발품을 판 끝에 화이트에 가는 빨간색 선 패턴이 있는 커튼을 골랐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이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가 집에 왔다. 먼지를 싫어하고 청소를 좋아하는 엄마는 내가 회사에 출근하고 나면 우렁각시처럼 딸 집 청소를 하곤 했다. 딸이 이사한 후 도와줄 일은 없는지 살펴보려고 부산에서 서울까지 온 엄마는 어떻게 하면 딸을 도와줄까 궁리했을 것이다. 나는 ‘엄마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고 있어.’라고 말했지만.
엄마 혼자 집에서 심심하진 않았을까 걱정하며 퇴근을 서둘렀다. 웃으며 나를 반기는 엄마를 뒤로하고 옷을 갈아입으려 침실로 들어갔다가 커튼을 보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엄마, 왜 흰 커튼이 딸기 우유색이 됐어?”
엄마는 그저 커튼을 세탁기에 빨았을 뿐인데, 내가 하필 물빨래가 안 되는 커튼을 사서 무늬도 못 알아볼 만큼 커튼이 망가졌다고 했다. 울고 싶었다. 그날따라 일찍 퇴근한 남편이 집에 와서 이 광경을 보고 말했다. “장모님, 커튼이 더 예뻐졌는데요!”
그러자 엄마와 남편이 딸기우유색 커튼도 예쁘다고 입을 모았다. 진심인 걸까? 10점 만점에 10점 사위란 것은 인정하겠지만, 레드 포인트 벽지와 커튼의 완벽한 조화가 깨진 건 어쩌라는 말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그토록 발품을 팔았던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포인트 벽지만 바라봤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벽지는 여전히 붉게 빛나고 있었다.
당장 새 커튼 살 돈이 없었던 나는 속으로 혼잣말을 했다. 이 집에 살면 얼마나 오래 살겠어. 침실은 잠자는 방이잖아. 잠잘 때 눈 감고 자면 돼지. 그래도 포인트 벽지는 붉게 빛나고 있잖아. 지지 않는 태양처럼.
그 후로 그 집에 무려 10년을 살았다. 그 10년 중 3~4년은 포인트 벽지에 꽤 만족했고, 그 이후는 조금 질렸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참고 살았다. 꼬박 10년을 살고 난 후 벽지를 바꿔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땐 벽지는 매우 빛이 바래 있었다. 하지만 레드 포인트 벽지를 바른 침실에 질리도록 살아 봤기에 다시는 레드 포인트 벽지를 바르지 않겠다는 방향성은 생겼다.
반면 순수한 연두색 벽지를 아직 경험하지 못했기에, 연두색에 대해서는 아직 미련이 남아있다. 벽지를 고를 땐 내가 원하는 컬러 색과 톤은 무엇인지, 이 집이 얼마나 오래 살 집인지를 생각하고 고르라고 권하고 싶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지만 그래도 한 치 앞을 내다보며 골라야 후회가 없는 것이 벽지 색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