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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C Apr 14. 2020

지식과 지혜는
낡더라도 헤지지 않는다

<그리움 스물하나> 

- 처음 한 번 다녀왔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이야깃거리가 되고특별한 사연이 담긴 어떤 책을 찾기라도 하면 자랑할 만한 더 큰 이야깃거리가 되는 곳그렇게 재미를 붙이고 마침내 단골이 되었을 때 돌아보면 정말로 할 이야기가 많은 아지트헌책방은 그리운 추억의 면면한 배양처다     


     

    무엇이든 재사용할 수 있다면 지구에 좋은 일이다. 어떤 물건이라도 그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적든 많든 에너지가 소모되고 필연적으로 탄소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을 팔아야 먹고 사는 입장에서 책의 재사용은 달갑지 않다. 인세가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책은 방송콘텐츠처럼 재판매된다고 해서 그 이익금이 생산자에게 돌아오는 구조가 아니다. 다소 불합리하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어쩔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생산자로서의 나를 지우고 소비자로서의 나만 놓고 본다면, 나는 헌책방을 무지무지 사랑한다. 가계지출에서 차지하는 책값의 비율이 제법 높은 편이라서 책을 싸게 살 수 있는 헌책방의 존재가 고맙기 그지없다. 그리고 헌책이라고 하면 꼬질꼬질 때가 묻고 찢긴 책을 생각하기 십상인데, 어떤 책들은 헌책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깨끗하다. 전 주인들이 깨끗하게 읽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장식처럼 책장에 꽂아만 뒀기 때문일 수도 있다. 가능하면 깨끗한 책을 선호하지만, 절판된 것들은 쉽게 구할 수 없는 만큼 지저분하더라도 개의치 않는다. 책이 아무리 낡더라도 그 안의 지식과 지혜가 헤지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요즘은 헌책방을 이용하기도 편해졌다. 온라인시스템을 갖춘 곳들이 많아서 집에 가만히 앉아 책을 주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역시 헌책방은 여기저기 발품을 팔며 돌아야 진정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헌책방은 보물섬이다. 구하기 힘든 책을 마침내 찾았을 때의 희열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그렇게 찾아주기를 원하는 보물들이 헌책방 곳곳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기다리고 있다. 이따금 생각지도 않았던 보물을 발견할 때도 있다. 보수동 헌책방골목에 갔을 때의 일이다. 



    보수동 헌책방골목은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들에 의해 형성된 공간이다. 한때 헌책방이 100개가 넘을 정도로 호황인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반 토막도 안 되는 수준으로 규모가 줄었다. 물론 독서인구의 감소 탓이다. 새책도 읽지 않는데, 하물며 헌책은 말할 것도 없다. 보수동 헌책방골목에는 현재 38개의 점포만이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남겨진 헌책방들은 그간 해오던 관성의 힘으로 겨우 버티는 중이다. 40년 가까운 역사의 대우서점도 마찬가지다. 보수동 헌책방골목에서 가장 큰 축에 속하는 대우서점 안으로 들어서자, 헌책 특유의 냄새가 '훅' 하고 달려들었다. 비단 종이 삭는 냄새만은 아니었다. 한때 책을 소유했던 모든 이들의 모든 체취가 책에 묻어 있었다. 그 체취 중에는 온갖 감정이 뒤섞인 눈물과 콧물(책을 읽는 동안 기뻐하고, 슬퍼하고, 분노하고, 좌절하면서 흘렸던)로 말미암은 것도 분명히 포함돼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곳에서 문학코너를 기웃거리다가 별생각 없이 최인훈의 <화두>를 책장에서 집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표지를 넘기자 저자의 친필사인이 보였다. '○○○선생님께, 94. 5. 15. 평소의 격려에 깊이 감사드리며. 최인훈.‘ 

    어떤 길로 그 책이 그곳까지 흘러들어왔는지 알 길 없지만, 지식과 지혜의 또 다른 보물섬인 헌책방은 이처럼 절판본과 희귀판본 그리고 특별한 주인이나 작가의 흔적과도 만남을 주선하며 때로 놀라운 순간을 선물하곤 한다. 

    나는 책을 좋아하는 지인들에게 꼭 한번씩 이 이야기를 한다. 그러고 나서 가까이 헌책방이 있다면 반드시 들여다보라고 권한다. 처음에는 머슬머슬 하더라도 헌책에게 말을 붙이다 보면 당신도 곧 그런 순간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거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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