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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C Apr 14. 2020

아름다움은 단지
보는 것에만 있지 않았네

<그리움 스물> 

- 마음 깊이 그리운 것들은 꾸밈없이 담백한 것들이다화려하게 치장한 것들은 눈이 즐겁지만본연의 모습만으로 울림을 주는 것들은 영혼이 즐겁기 때문이다     

   

    조르주 루스라는 프랑스 출신의 설치미술가이자 사진가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대상의 이데아가 포착되는 ‘특정 지점’에 대한 작업으로 유명했다. 작품이 설치된 전시장에 막 들어섰을 때,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여러 색깔의 면과 선이 공중과 벽과 바닥에 흩뿌려져 있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손가락으로 정확히 한곳을 가리키며 거기 서보라고 했다. 시키는 대로 했다. 그랬더니 전시장이라는 공간에 해체되어 있던 그 모든 것들이 빈틈없이 결합되어 완성된 하나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굉장히 신선한 경험이었다. 

    나는 그 이후로 어떤 대상을 볼 때면 루스가 작품으로 증명한 그 지점을 찾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쓴다. 이미 내 눈앞에 존재를 드러낸 대상이지만, 완전무결함 그 자체로 모습을 드러내는 지점. 그걸 알아내려 나는 면밀하게 대상을 관찰하고 주변과 관계도 깊이 들여다본다. 이는 어느새 내 습관으로 자리 잡았고, 덕분에 종종 놀라운 발견을 하곤 한다. 확신하는데, 나는 전보다 한층 나은 눈을 가지게 됐다.      


    은행나무가 노란색 비를 보슬보슬 뿌리던 늦가을의 부석사. 초저녁의 어스름에 떠밀려 사람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올 때, 되레 안으로 들어갔다. 부석사는 천왕문에서 무량수전에 이르기까지 높낮이가 서로 다른 석축을 차곡차곡 쌓아 마치 계단처럼 부처에게 가는 길을 연다. 

    석축은 아홉 단으로 보는 게 일반적이지만, 관점에 따라 열 단에서 열두 단까지 보기도 한다. 건축 당시 어떤 배경을 가지고 석축을 쌓았는지는 지금으로서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아홉 단이라고 하면 할 말이 좀 생긴다. 무량수경의 삼배구품(죽어 극락에 다시 태어나는 사람은 살아생전 공덕을 쌓은 정도에 따라 상중하 삼배로 나뉘고 각 배마다 다시 상중하 삼품씩 모두 구품으로 분류된다는 이론)과 통하기 때문이다. 

    부석사는 세 단의 석축을 오르면 실질적인 경내라 할 수 있는 회전문 권역, 다시 여기서 세 단의 석축을 오르면 범종루 권역. 마지막으로 세 단의 석축을 오르면 안양루 권역에 이르러 무량수전의 아미타부처를 만난다. 세 개의 큰 권역과 그에 딸린 세 개의 작은 구역이 삼배구품을 건축적으로 구현한 것이라는 해석에 무리가 없다.    

    한 발 한 발 한 단 한 단. 마침내 안양문 아래 통로를 지나 무량수전 앞마당에 섰다. 안양문에 이르러 부석사는 중심축을 살짝 튼다. 천왕문에서부터 범종루까지 북동쪽에 축선을 두고 곧게 뻗어 나가다가, 안양문에서 45도 정도 왼쪽으로 축선을 틀어서 정북쪽에 거의 일치시킨다. 산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랬을까? 부석사는 축대를 쌓아서 건물이 들어설 자리를 만들었지, 산을 깎아서 그 자리를 만든 게 아니다. 그러므로 부석사의 중심축을 끝까지 일직선으로 유지했을 경우, 안양루 권역이 좁아서 옹색해지는 면이 있긴 하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역시 알 수 없지만, 덕분에 다른 각도에서 소백산맥의 줄기를 조금 더 넓게 조망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범종루에서는 힘차게 아래로 흘러내리는 도솔봉, 묘적봉, 흰봉산 등 소백산맥의 봉우리들이 정면에 보인다. 자세를 고쳐 앉은 무량수전에서는 그보다 낮고 편안히 흘러내리는 야트막한 산들이 정면에 보인다. 강물로 치자면 상류에서부터 급하게 내려온 물살이 평안을 찾으며 잔잔히 흐르는 하류의 모습. 음악으로 치자면 클라이맥스를 넘어서 곡을 정리하는 단계라 할 수 있다.      


    저물녘에는 사물과 사물의 경계가 어스름에 뭉개지지만, 산너울만은 오히려 더 또렷해진다. 너울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얌전한 등성이조차도 그 시간에는 낱낱이 드러난다. 산, 산 그리고 또 산, 산……. 소백산맥은 그가 품은 수많은 산을 첩첩이 업고 포개면서 장쾌하게 뻗어 나간다. 누구라도 이 놀라운 풍경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렇다. 나는 배흘림기둥의 단아한 무량수전도 아니고, 한껏 멋을 부린 안양문과 범종루 같은 2층 누각도 아닌 저물녘 펼쳐지는 장엄한 대자연의 이 한 장면을 보기 위해 부석사에 오른 것이다.      

    그런데, 한참 그 풍경을 바라보노라니 문득 소백산맥의 능선들이 부석사 부속 건물들의 기와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 정말 꼭 닮았다. 나는 그 둘이 마치 본래 하나인 듯 보이는 지점, 그럼으로써 그 둘의 모자람이 서로를 채우고 넘침이 서로에게 수렴되는 ‘특정 지점’을 찾고 싶었다. 조사당 쪽으로 올라가며 무량수전과 안양루의 기와선을 능선과 배치시켜도 보고, 안양루에서 범종루와 종무소 등의 기와선을 능선과 배치시켜도 보았다. 그러기를 거듭하다가 마침내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이 빈틈없이 결합되어 완성된 하나로 모습을 드러내는’ 지점. 장경각 뒤편에서 범종루의 지붕이 살짝 보이는 자리야말로 내 이상을 만족시키는 그 지점이었다. 

    소백산 정상 비로봉에서부터 된바람에 빗살 치듯 왼쪽 하단을 향해 와락 쏟아지는 능선. 장경각과 범종루의 용마루에서부터 마찬가지의 결을 타고 가지런히 쏟아지는 기와선. 능선이 기와선인 듯, 기와선이 능선인 듯 이질감이라고는 전혀 없는 두 대상이 한 프레임 안에서 섞이어 어울리며 흘러내렸다. 이것이 바로 일체 거스름이 없는 완벽한 아름다움. 최순우 선생이 그의 책(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에서 자연과 건조물의 조화를 통해 구현했다고 평가한 ‘순리의 아름다움’ 가운데서도 백미가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아름다움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저녁이 깊어질수록 짙어지는 어둠에 소백산맥의 첩첩 능선을 비롯해 장경각과 범종루의 가지런한 기와선이 하나둘씩 무너졌다. 목적을 다 이룬 나는 그제야 홀가분한 마음으로 부석사를 나서려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범종루에서 사물(四物)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네발짐승을 위로하는 법고가 먼저 울고, 수중동물을 위로하는 목어가 따라 울었으며, 날짐승들을 위로하는 운판이 그 다음으로 울었다. 그리고 잠시 뒤 묵직한 진동이 온 사방을 휘감았다. 지옥 생명의 고통과 번뇌조차도 위로하는 범종의 울음. 심장 깊숙한 곳으로 침잠해 뿌리까지 흔드는 그 깊은 진동이 서른세 번 울리자, 눈물이 왈칵 흘러나왔다. 단지 나무가 가죽을 때리는 소리, 나무가 나무를 때리는 소리, 쇠가 쇠를 때리는 소리, 나무가 쇠를 때리는 아주 단순하기 짝이 없는 소리일 뿐인데……. 

    사실 누군가 위로할 때는 치장을 할 필요가 없다. 단순명료한 게 좋다. 그 아픔을 이해하고 보듬는 마음만 읽히도록 해야 한다. 타고난 물성(物性) 그대로 자신의 몸을 아프게 울림으로써 상대를 위로하는 사물의 소리에는 거짓 한 톨 없는 진심만 담겨 있다. 아마도 그래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던 것 같다. 말 한마디 없는 소리지만 내 아픔을 자신의 것인 양 위로하는 진심이 느껴져서. 

    좀처럼 가시지 않는 사물소리의 여운을 곱씹으며 부석사를 내려오는 길. 불현듯 사물소리도 부석사라는 지점과 저녁이라는 시점에 서 있던 내게, 선물처럼 다가온 일체 거스름이 없는 완벽한 아름다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로지 상대를 위해 사는 사물의 이타행, 자신을 희생해 상대를 구원하는 그 소리는 적어도 내게 있어 고귀하고 숭고한 소리였기 때문이다.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기둥 #사물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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