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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떠나면 개고생(?)

고생 아닌 고생은 추억의 한 조각을 남기고.

by 방구석여행자


지금보다 조금 어렸을 적의 나는 패기가 넘쳤었다. 아니 어쩌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미국에서 어학연수했을 때 미국 서부 이모집에 체류하고 있었던 나는 방학을 맞아 한국에서 직장 휴가를 맞아 여행 오는 친구와 미국 동부의 뉴욕 여행을 마치고 친구는 한국으로 다시 돌아갔고, 나는 다시 이모집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직항으로 갈 수도 있었겠지만, 돈을 벌지 못했던 시절이었기에 한 푼이라도 아끼고자 경유를 두 번 하는 스케줄을 선택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미련했었다. 뉴욕에서 출발하여 첫 번째 경유지였던 애틀랜타로 가는 길이었다. 비행기가 출발을 안 하고 지연이 됐었다. 여행을 많이 안 했던 때라 경유할 때 비행기가 지연될지도 모른다는 건 전혀 생각을 못했었던 나는 집에 빨리 도착하고 싶었던 마음에 경유시간 간격이 짧은 스케줄을 잡았었는데 그게 바로 집에 더 늦게 도착하게 되는 결정적 이유가 됐었다.

비행기가 지연되어 첫 번째 목적지인 애틀랜타를 도착하자마자 비행기를 놓쳐버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비행기는 그날의 마지막 비행기였고, 어쩔 수 없이 가장 빠른 스케줄인 다음날 첫 비행기로 다시 스케줄을 잡았다. 승무원이 근처 호텔 바우처를 주냐고 물어봤지만, 이런 상황이 올 줄 몰랐던 나는 돈을 다 써버렸고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었다. 오갈 데 없던 내가 선택할 수 있었던 건 바로 공항 노숙이었다.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공항 노숙이라는 걸 경험해봤다.

애틀랜타 공항에는 사람이 많았고, 공항에는 불도 환하게 켜져 있어 전혀 무섭지 않았다. 이 상태가 계속 유지될 것만 같아 안심했었다. 그렇게 자지만 않으면 되겠지 라는 마음으로 잠들지 않으려고 열심히 공항 면세점을 전전하며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한 면세점 직원이 공항이 이제 곧 한산해질 것이라는 이야기를 해줬다. 그 이야기를 듣고서도 '설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어딜 가겠어'라는 생각으로 그 말을 믿지 않았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많던 사람들이 사라졌고, 공항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무서웠다. 졸음은 쏟아졌고, 낯선 곳에서 혹시 어떻게 되는 건 아닌가 두려웠다. 잠들지 않으려고 더 열심히 돌아다녔다. 지나가면서 청소부 아주머니와 간단한 대화도 나누었고, 인심 좋아 보이시던 아저씨와 이야기도 했었다. 그래도 시간은 천천히 갔고, 돌아다니다 지쳐 탑승구 앞의 의자에서 잠이 들었다. 공항에 혼자 앉아 추위에 벌벌 떨며 잠들어있던 게 애처로워 보였던지 아침에 일어나 보니 담요가 덮어져 있었다.

세상 아직 살만 하구나

그 따스한 온기에 긴장을 풀고, 스르르 잠이 들었고, 다음날 아침이 되었다.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들렸다. 비행기 탈 시간이 되어 첫 비행기를 탔고,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 비록 걱정했던 이모에게 많이 혼나긴 했지만, 나에게는 잊지 못할 추억이 하나 생겼어서 그다지 나쁘지는 않았다.

그 이후로 몇 년 뒤 공항 노숙을 했을 때 힘들었지만 추억이 하나 생겼던 나는 혼자 북유럽여행을 갔을 때도 공항 노숙을 했었다. 미국 여행 때는 어쩔 수 없이 했었던 공항 노숙.
그러나 북유럽여행 갔을 때는 공항 노숙을 염두에 두고 비행 스케줄을 예약했었다. 한번 해봤기 때문에 할만하다고 생각해서 만만하게 봤었던 것 같다. 그래도 러시아 모스크바 공항은 공항 노숙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공항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서 그랬는지 실제로 여행을 할 때 밤늦게도 공항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고, 침낭을 펴고 공항 노숙을 하는 사람들도 봤었다. 동지들이 많았다는 것은 나로서는 참 다행이었다. 그중 한 명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었다.

미국에서 어쩔 수 없이 공항 노숙을 했을 때의 나는 어렸었고, 패기가 넘쳤었다. 힘들고, 피곤했어도 상황 자체를 즐겼었다. 러시아에서 계획하고 공항 노숙을 했을 때의 나는 세월이 흘렀고, 나이는 못 속인다는 말이 있듯이 많이 피곤하고 몸이 고단했던 기억이 있다. 사람은 즐거웠던 기억은 금방 잊어버리지만, 고생했던 기억은 계속 남아있다고 들었는데 그래서인지 공항 노숙을 했던 기억은 잊히지 않고 머릿속에 남아있다. 쉽게 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요즘 공항마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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