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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토성을 우리 선조가 지었다?

뼈아픈 역사의 현장, 구마모토성

근래 구마모토 熊本 로 여행을 떠나는 분들이 점차 늘고 있습니다. 구마모토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 중 하나가 구마모토성 熊本城 이 아닐까 싶은데요. 하지만 정작 대부분의 여행객이 구마모토성 축성에 우리 선조가 동원되었다는 사실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 시간엔 구마모토의 대표적 관광지인 구마모토성이 우리 선조들에 의해 축성된 배경과, 그분들의 삶의 흔적이 희미하게나마 남아있는 울산마치 정류장에 대해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구마모토성 입구에 서있는 가토 기요마사의 동상

임진왜란의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

구마모토성 남측 출입구로 가는 길목에는 기다란 모양의 투구를 쓴 인물의 동상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는 가토 기요마사라는 왜군 장수의 동상인데요. 가토 기요마사라는 이름이 다소 낯설게 들릴 수 있지만, 이 이름을 우리식으로 발음하면 무릎을 탁 치실 분들도 계실 겁니다. ‘가등청정 加藤清正'.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선봉장으로, 불국사에 방화를 저지르고 임해군과 순화군을 인질로 잡는 등 우리에게 치욕을 안긴 장수 가등청정의 동상이 구마모토성 입구에 우뚝 서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바로 그가 구마모토성을 축성한 장본인이기 때문입니다. 무심코 방문했던 구마모토성이 사실 우리 역사의 철천지 원수가 축성한 곳이라니 놀랍지 않으신가요? 하지만 더욱 놀라운 사실은 우리 선조들이 이 성의 건축에 강제 동원됐다는 점입니다.


구마모토성 천수각 天守閣 모형

울산왜성의 실패를 교훈 삼아 축성된 구마모토성

구마모토성은 가토 기요마사가 정유재란 당시 울산왜성 蔚山倭城 전투에서의 뼈아픈 실패를 교훈 삼아 구마모토에 축성한 성입니다. 가토 기요마사는 전황이 불리해지던 임진왜란 후기, 조명연합군 朝明聯合軍 에 대항하기 위해 지금의 울산광역시 학성 鶴成 에 왜성 倭城 을 쌓았습니다. 전투 초기, 5만여 명의 조명연합군은 2만여 명이 채 되지 않는 왜군을 얕잡아보고 무력으로 이들을 점령하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왜성의 높은 방어력으로 인해 쉽사리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습니다. 울산왜성 점령에 고전을 면치 못하자 조명연합군은 전략을 무력 점령에서 고사 작전으로 변경했습니다. 왜성으로 흘러 들어가는 태화강 물줄기를 모두 봉쇄하고 성 주변의 우물 또한 모조리 묻어 버리자 왜군은 커다란 위기에 빠집니다. 전투 직전 성이 완공되는 바람에 군수 물자의 비축이 턱없이 부족했으며, 우물도 미처 파놓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식량과 물이 떨어지자 왜군의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갈증과 굶주림이 극에 달하자 왜군은 군마 軍馬 를 잡아먹고, 피와 소변을 마셨으며, 자군의 사체마저 뜯어먹었다고 합니다. 결국 가토 기요마사는 할복 직전까지 갔으나,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하여 본국으로 귀환하였습니다. 이후 구마모토번의 초대 영주가 된 그는 구마모토성 축성을 시작합니다.


구마모토성을 배경으로 한 세이난전쟁의 한 장면

난공불락의 요새, 구마모토성

가토 기요마사는 울산에서 겪은 쓰라린 경험을 절대 잊지 않았습니다. 울산왜성 축성 당시의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구마모토성을 건설했는데, 특히 성 내에 원활한 식수 공급을 위해 우물을 120여 개나 팠으며, 식량 부족에 대비해 토란 줄기로 다다미를 짰습니다. 또한 같은 이유로 많은 양의 조롱박과 은행나무를 성 내 곳곳에 심었는데, 이로 인해 구마모토성은 은행성 銀杏城 이란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구마모토성은 완공 270여 년이 지난 1877년 메이지 정부군과 반란군 사이의 내전인 ‘세이난전쟁 西南戦争' 때 그 진가를 발휘합니다. 3천여 명에 불과하던 정부군은 구마모토성을 거점으로 1만 3천여 명에 이르는 반란군을 상대로 농성전을 벌입니다. 하지만 반란군은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성을 쉽사리 함락시키지 못했고, 공성전은 무려 60여 일 동안이나 이어졌습니다. 반란군은 결국 구마모토성 함락에 실패하고 패주했는데, 이후 구마모토성은 ‘난공불락의 성’으로, 가토 기요마사는 ‘축성의 달인’으로 재조명되었습니다.


울산마치 정류장 표지판 ⓒ나무위키

임진왜란이 남긴 역사적 흔적, 울산마치

구마모토성 인근에는 ‘울산마치 정류장(蔚山町停留場)’이라는 전차역이 있습니다. 역 이름 ‘울산’은 우리나라의 울산광역시와 동일한 한자를 사용하며, ‘마치(町)’는 우리의 읍 정도에 해당하는 일본의 행정구역입니다. 즉, ‘울산마치 蔚山町 うるさんまち’는 우리말로 ‘울산마을’ 정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울산마치’의 ‘울산'이 바로 우리나라의 울산광역시를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가토 기요마사는 본국으로 철수할 때 울산왜성 축성에 동원된 다수의 울산 출신 조선인 포로들을 납치하여 구마모토에 정착시켰습니다. 그는 구마모토성 축성에 다시 한번 이들을 동원하였고, 보다 높은 완성도의 성을 건축하는데 성공합니다. 즉, 울산마치는 당시 울산 출신 조선인들이 살던 마을이었고, 이 때문에 우리나라식 발음이 현재까지 이어져 온 것입니다. 비록 울산마치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신마치 新町 로 변경되어 행정구역상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이름이 되었지만, 1929년에 개통된 울산마치 정류장의 이름은 아직 남아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구마모토성은 일본 3대 성 중 하나로 꼽히는 일본의 대표적 문화유산으로 오늘날 수많은 관광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는 임진왜란이라는 비극적 역사와 함께, 고향을 떠나 타국에서 성을 쌓아야 했던 우리 선조들의 아픈 역사가 깃들어 있기도 합니다. 울산마치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는 작은 흔적 속에서, 구마모토 성이 단순한 관광지가 아닌, 역사의 교훈과 평화의 소중함을 되새기는 장소로 기억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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