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석자에 담긴 아빠의 마음

응급실 기억(1)

by 온정

“우리 아빠는 무뚝뚝해.”

“우리 아빠는 자상한 편이야.”

“우리 아빠는 친구 같아.”


어린 시절, 친구들은 종종 본인의 아빠에 대해 설명하곤 했다. 아빠가 사회인으로서 어떤 사람인지는 자녀들이 파악하기 쉽지 않지만, ‘아빠’라는 직책만으로 보았을 때 그들의 이미지는 대체로 짧은 문장으로도 설명이 가능했다.

그러나 나의 아빠는 딱 잘라서 표현하기에는 조금 어려운 구석이 있었다. 일단 그는 엄했다. 초등학생 때 용돈을 모아서 발목까지 오는 긴 청치마를 산 적이 있다. 아빠는 내가 그 치마를 입은 모습을 보자마자 당장 버리라며 화를 내셨다. 교복을 입기 전까지 웬만하면 치마를 입지 않길 바라셨던 것 같다. 아빠 때문에 장롱에 처박아둔 긴 청치마는 1년 뒤 대유행을 했다. 길을 다니는 모든 학생들이 똑같은 청치마를 입고 다니니 아빠는 할 말이 없어졌다. 그제야 난 겨우 청치마를 꺼내서 가끔 입을 수 있었다. 친구들은 나보고 패션의 선구자라고 칭하기도 했지만, 막상 나는 아빠 눈치를 보느라 원하는 옷을 입지 못할 때가 더 많았다.

게다가 아빠는 나의 학창 시절 내내 연속극을 절대 못 보게 하셨다. 아, 딱 한 가지. 사극만은 허락해주셨다. 사극에는 별 관심이 없었기에 내가 본 드라마는 <허준>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학교에 가면 친구들이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어제 본 드라마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때마다 대화에 낄 수 없었기에 나는 정말이지 아빠가 미웠다. 나 이러다가 왕따 되겠다며 몇 번이고 울면서 졸라도 아빠의 고집은 절대 꺾을 수가 없었다. 드라마는 애들을 망친다고 하셨다.

이렇게 보면 조선 시대의 보수적인 집안 같다. 아빠 입에서 '안된다'라는 말이 나오면 그건 정말 평생 안될 일이었다. 하지만 조금 역설적이게도, 그렇게나 단호한 아빠는 사실 딸이라면 껌뻑 죽는 딸바보였다.

아기 때 나는 피부가 발갛고 못생겼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빠가 시도 때도 없이 나의 연한 볼따구나 낮은 코를 사정없이 물고 뜯는 바람에 눈물을 터뜨리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얼마나 유난스러우셨는지, 장난기가 많은 이모들은 지금까지도 나를 놀리시곤 한다.

“윤정아. 너 어렸을 때 진짜 못생겼었는데, 네 아빠는 맨날 네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난리였어. 어휴, 얼마나 기가 막히게 사랑이 넘쳤는지 몰라. (절레절레)”

아기 때뿐만이 아니었다. 고등학생 시절 음악을 전공하고 싶다고 새벽까지 엉엉 울었던 적이 있다. 그런 나를 보다 못한 아빠는 새벽 2시에 갑자기 나를 차에 태우셨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뒷좌석에서 울다 잠이 들었는데, 부모님이 깨우셔서 눈을 떠보니 서해였다. 아빠는 시원한 바다에서 맘껏 울고 답답한 마음을 풀라고 하셨다. 재능 없는 딸에게 흔쾌히 음악을 해보라고 말해주실 용기는 없었지만, 적어도 말없이 따듯한 위로는 건넬 줄 아셨다.

아빠는 이렇듯 조금 거칠고 고집이 센 사람이었고, 그 덕에 충돌이 잦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가 자식들을 끔찍하게 아끼는 마음만은 부정해본 적이 없다. 나를 강하고 엄하게 키우시면서도 ‘공주님’이라는 호칭은 내 나이 서른이 될 때까지도 거두지 않으셨다. 그는 영락없는 자식 바보가 맞았다.


이 외에도 아빠가 딸바보 면모를 보여주셨던 사건은 많다. 아마 고등학교 2학년 때 맞이한 어느 주말이었을 것이다. 외식을 거의 하지 않던 우리 가족이 오랜만에 점심을 먹으러 밖에 나갔다. 줄 서서 먹는 소문난 아귀찜집이었다.

그때의 나는 공부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있었다. 몸과 마음이 모두 안 좋아져서 끼니마다 알약을 10개씩 먹으며 살았다. 그날도 많은 약을 먹은 뒤였는데 왠지 속이 이상했다.

‘왜 이러지?’ 생각하던 도중, 고추장 양념이 된 아귀찜 그릇이 우리 식탁 위에 올라왔다. 빨간 양념 밑에 숨겨진 통통한 콩나물과 탱글한 생선 살을 보니 입안에 군침이 돌았다. 두 젓가락 정도 먹었을까. 갑자기 옆구리 부분이 쑤셔오기 시작했다. 부모님께는 티를 내지 않고, 잠깐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말씀드렸다.

“아니, 음식이 이제 막 나왔는데 화장실에 간다고?”

엄마, 아빠의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지만 못 들은 척 가게 문을 향했다. 주택 건물이었기에 밖에 나가서 계단을 올라가야 화장실이 있었다. 손잡이를 부여잡고 겨우 화장실에 도착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면서 눈앞이 캄캄해졌다. 심상치가 않았다. 금방이라도 화장실 바닥에 고꾸라질 것 같았지만, 다행히 당시의 나는 정말이지 젊었다. 웬만한 아픔은 정신력으로 이겨낼 줄 알았더랬다. 그 와중에도 '오랜만의 외식인데, 쓰러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나의 정신을 지배했다. 비틀거리며 겨우 다시 음식점에 들어갔다.

부모님은 얼른 와서 먹으라며 내 앞접시에 생선을 올려주고 계셨다. 나는 최대한 태연하고 침착하게 말했다.

“엄마, 아빠. 저 이거 못 먹을 것 같아요. 배가....”

웬만하면 이런 이야기는 하지 않을 아이라는 것을 알기에, 부모님은 화들짝 놀라셨다. 내 얼굴을 보니 허옇게 질려있었더랬다. 상황을 파악하시고 많이 아프냐고 물어보시는 순간, 나는 반쯤 정신을 잃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아빠는 민첩했다. 아빠 도움을 받아 차 조수석에 앉았다. 아니, 누웠다. ‘비~비~ 꼬였네 들쑥날쑥해~’ 스크류바의 광고처럼 위가 베베 꼬이는 것만 같았다. 아빠의 낯빛부터 전혀 안 괜찮아 보이는데, 자꾸 나에게 “괜찮아, 우리 딸. 걱정 마, 우리 딸.”이라고 하셨다. 마치 본인에게 하는 말 같았다.

그렇게 생애 첫 응급실에 도착했다. 사람이 복작복작했다. 아빠의 부축을 받고 들어가서 접수를 하고는 몇 시간 동안 대기를 했다. 눈앞이 노래지다 못해 파래지고 식은땀이 줄줄 나는 바람에 몸이 추운 데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당장이라도 주저앉을 기세였고 누군가가 빨래 짜듯이 위를 쥐어짜는 것만 같아서 아파 죽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응급실이라는 공간 안에서 나의 아픔은 비교적 사소한 것이었다.

생전 처음 겪는 아픔에 손으로 배를 부비는 일만 반복하다가 겨우 내 순서가 돌아왔다. 급히 달려오신 간호사 선생님이 내게 따라오라고 하셨다. 워낙 바쁘셨는지 선생님은 잰걸음으로 걸으며 동시에 증상을 물으셨다.

“정확히 어디가 아프세요?”

“여기... 배가... 오른쪽 배가... 하아...”

나는 숨조차 고르게 쉬지 못했다. 헉헉대면서 그녀를 따라가기에 바빴다. 대답을 제대로 하기엔 역부족이었고, 내 눈동자는 점점 초점을 잃기 시작했다. 결국 어느 순간 아빠에게 몸을 기댄 채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간호사 선생님은 나의 눈에 후레시 비슷한 불빛을 비추었다. 그와 동시에 물었다.

“환자분,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ㅈ... 저요...?... ㄴ... 나....ㅇ.....”

아빠가 옆에서 거들었다.

“나윤정이에요.”

간호사 선생님은 똑바로 나를 보며 다시 물었다.

“환자분, 성함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어요?

“ㄴ.......”

온 힘을 다해 입술을 떼다가 결국 나는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고, 순간 아빠는 큰소리로 외치셨다.

“나윤정이라고요! 나윤정!!!! 나!윤!정!!!!!”

간호사 선생님은 아빠를 보며 대답했다.

“아니요, 아버님. 환자분의 성함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의식을 확인하기 위해 일부러 물어보는 거예요.”

그 말을 들은 아빠는 한껏 머쓱해졌다. 어이쿠, 죄송하다며 사과하셨다. 나름대로 긴박했던 그 상황에서 나는 오히려 웃음이 났다. 그와 동시에 정신이 조금 들어서 내 이름을 말할 수 있었다.

“나윤정이요.”

아빠가 갑갑함에 언성을 높이긴 했지만, 간호사 선생님께서도 기분 나빠하지 않고 오히려 나처럼 조금 웃으셨다. 셋 다 멋쩍게 피식거리며 검사를 받으러 갔다.


잔병치레는 많이 했어도 생전 응급실에 갈 정도로 아픈 적이 없었던 딸. 식탁에 막 나온 뜨끈한 아귀찜을 뒤로한 채, 딸을 옆에 태우고 액셀을 밟으며 아빠는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을까.

이런저런 검사를 끝낸 뒤 나는 침대 하나를 차지하고 링거를 맞았다. 하얀 응급실 천장을 바라보다가 한잠 푹 자고 나니 더 이상 식은땀이 흐르지 않았다. 검사 결과 병명은 스트레스로 인한 위경련으로 밝혀졌다.

그날 이후에도 나는 종종 위경련을 앓았다. 증상을 알고 난 뒤 다시 겪는 위경련은 확실히 덜 놀라웠다. 응급실에 가지 않고 상비약으로 가라앉힐 수도 있게 되었다. 하지만 처음 위경련을 겪었던 그 순간을 나는 절대 잊지 못한다. 조급한 마음에 내 이름 석 자를 열심히 외치던 우리 아빠. 그때를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딸을 누구보다 엄하게 키우시다가도, 사랑 앞에서 와르르 무너지던 그때 아빠의 모습을 떠올리면 괜스레 마음이 짠해지기도 한다.


여전히 아빠는 어떤 면에서 매우 엄하다. 내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매일 눈물을 흘려도 아빠는 말씀하시곤 했다.

“원래 남의 돈 받고 사는 게 다 어려운 거야. 다들 그렇게 살아가잖아. 이겨내야지.”

위로 한마디 건네주실 수도 있을 텐데 어찌나 그렇게 냉정하신지. 무심해 보이는 아빠가 미울 때도 많았다. 하지만 역시나,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가 자식들을 끔찍하게 아끼는 그 마음만은 부정할 수가 없다. 오늘도 응급실 사건을 생각하며 아빠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그가 큰소리로 외치던 나의 이름 석자를 떠올려본다.





커버 사진/ 필름 카메라 OLYMPUS PEN EE-3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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