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보호자

응급실 기억(2)

by 온정

'홍군'은 저의 남편입니.



그날은 그와 결혼반지를 보러 가기로 한 날이었다. 지금은 ‘홍서방’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아낌없이 애정을 표출하시지만, 결혼을 준비하던 초기에는 엄마가 그를 조금 어색하게 대하곤 했다. 아마 딸 가진 부모의 어쩔 수 없는 마음이었으리라. 그러다 결혼반지를 보러 갈 때쯤, 그러니까 결혼을 4개월 정도 앞두었을 때부터야 엄마는 슬슬 홍군에게 딸을 보낼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듯했다. 그리고 그 마음을 ‘밥’으로 표현하기 시작하셨다.
“반지 보러 가기 전에 홍군한테 집에 들르라고 해. 엄마가 점심 차려줄게.”

엄마표 손님상은 보통 그 규모가 명절에 차리는 밥상과 비슷했다. 메인 메뉴 세 종류에 밑반찬 열 종류 정도랄까.

그날도 엄마는 큰 상을 차리기 위해 아침부터 분주하게 요리를 하셨고, 마땅히 도와드려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며칠 전 스피닝 운동을 한 뒤로 근육통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벅지가 찢어질 듯 아파서 밤새 한 숨도 못 잤다. 뭔 근육통이 이렇게까지 아픈가 싶어 인터넷으로 증상을 찾아보았다. 극심한 근육통에 콜라색 소변까지 나온다면 ‘횡문근융해증’을 의심해보아야 한다는 글들이 보였다. 근육이 녹으면서 빠져나온 독성 물질들이, 혈액 속으로 스며들면서 신장까지 위험해질 수 있는 질환이라고 했다. 대학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다는 후기들도 종종 보였다. 안 좋은 예감이 밀려왔다.
‘아, 이거 보통 일이 아닐 수도 있겠다.’
홍군에게 메시지로 상황을 설명했다. 대신 부모님이 걱정하실 수 있으니,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 일을 굳이 드러내지는 않기로 했다.

그렇게 홍군이 집으로 왔고, 우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점심 식사를 했다. 웃고는 있었지만 사실 그와 나의 속은 타들어가고 있었다. 머릿속으로는 병원 갈 리를 하느라 디에도 집중할 수 없었다.


밥을 다 먹고 나니 아빠가 얼른 반지를 보러 가라며 등을 떠미셨다. “다녀오겠습니다~” 우린 부모님께 하얀 거짓말을 한 뒤 일단 동네에 있는 가정의학과로 갔다. 앉을자리도 없이 사람들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마음을 졸이며 1시간 정도 대기했을까. 드디어 진료 차례가 되어 선생님께 상황을 설명드렸다. 선생님의 대답은 간결하고도 명확했다.
“제가 소견서 써드릴게요. 얼른 대학병원으로 가세요.”
대기 시간은 1시간이었으나 진료 시간은 딱 1분이었다. 우리는 병원을 나서서 대학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벌써부터 녹초가 되었다.



응급실에 오니 또다시 고통의 대기가 시작되었다. 그나마 걸을 때는 참을만했지만 일어나 있다가 앉을 때, 혹은 앉아있다가 일어날 때면 고통이 극에 달하여 눈물이 주륵주륵 흘렀다. 그가 부축해주었지만 안타깝게도 아픔을 거의 덜지 못했다. 가만히 누워있지 않는 이상, 계속해서 허벅지 힘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이때 처음 알았다. 움직일 때마다 온 얼굴의 근육이 일그러지는 나를 보며 그는 마음 아파했다.


4시간 정도 지났을까. 지쳐서 그의 어깨에 기대어있는데 간호사 선생님이 다가오셨다.
“횡문근융해증인 것 같다고 하셨죠?”
“네....”
선생님은 내가 앉아있는 자리에서 바로 피를 뽑아가셨다. 내가 누울 침대 자리는 없었기에 수액도 앉은 채로 맞았다. 그렇게 또 한참이 지나고 피검사 결과가 나온 뒤에야 진료를 받았다.


“환자분, 독성 수치가 좀 높아요. 입원해서 치료받는 게 좋으실 것 같습니다. 대신 치료는 간단해요. 아마 일주일 안으로 퇴원하실 수 있을 거예요.”
입원. 기다림 끝에 그 단어를 듣는데 나는 차라리 안심이 되었다. 이토록 아픈데 집으로 가야 한다면 그것이 더 끔찍한 일이리라.



고통은 여전했지만 마음의 긴장이 조금 풀렸다. 생애 두 번째 응급실이자 생애 첫 입원의 사유가 ‘무식하게 운동한 죄’라니. 나는 그를 보며 웃었다.
“푸하하 오빠. 우리 오늘 결혼반지 보러 가려고 했는데, 웬 응급실까지 와서는 별 고생을 다했네?”
그런 나를 보며 그의 눈썹은 한껏 쳐졌다. 아픈데 억지로 웃지 말라고 했다.

장난스럽게 이야기하긴 했지만, 하루 종일 그에게 어찌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사실 인터넷을 검색하던 순간부터 나는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그 후로 입원이 결정되기까지 그는 장장 10시간 동안 내 곁을 지켰다. 운전해주고, 부축해주고, 기다려주고, 어깨를 빌려주면서. 만일 10시간 동안 부모님이 운전해주시고, 부축해주시고, 기다려주시고, 어깨를 빌려주셨다면 난 불효녀가 된 듯한 느낌을 멈출 수 없었을 것이다. 또 죄송한 마음에 짓눌려 웃음 따위가 나올 여유 또한 없었을 것이다.

입원 소속이 진행되는 동안 부모님께 메시지를 보냈다. <엄마, 아빠. 별일 아니니까 절대 놀라지 마셔요.>로 시작하는 장문의 메시지였다. 처음에는 별 일이었지만, 홍군과 함께한 덕에 이제는 별거 아닌 일이 되었다. 결국 마지막에는 부모님께 태연하게 연락드릴 수 있어 다행이었다.

메시지를 확인하신 부모님이 놀라서 전화를 거셨다. 나 대신 받아서 상황을 설명하는 홍군에게 부모님은 말씀하셨다.


어휴, 다 고생 많았어. 하루 종일 많이 힘들었을 텐데.... 우리가 걱정할까 봐 그 과정을 알리지도 않고 둘이서 그걸 다 해결했다니... 아이고, 기특해라. 아이고, 든든하다, 우리 사위... 벌써 온정이 보호자가 다 됐네.”


그때 엄마와 아빠는 안도감과 함께 묘한 감정을 느꼈다. 결혼식을 할 때, 아빠는 딸의 손을 잡고 버진로드를 걷는다. 그러다가 단상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신랑에게 딸의 손을 건네준다. 아마 부모님은 그때 느끼게 될 감정을 응급실 사건으로 인해 미리 느끼신 듯했다. 딸의 손을 사위에게 건네줄 때의 그 감정 말이다.

결혼을 하기 전 29살이 될 때까지 부모님과 떨어져 본 적이 거의 없었다. 겨우 3개월 동안 해외연수를 갔을 때 빼고, 여행하느라 2주 정도 집을 비운 것 빼고는 항상 부모님과 함께 했다. 그래서인지 내가 아무리 의젓하게 혼자 많은 일들을 해내도, 부모님 눈에는 아직도 내가 아기 같다고 했다. 매 순간 나를 걱정하고 챙기셨다. 다 컸지만서도 언제나 나의 보호자는 부모님이었다. 하지만 이 날, 부모님은 든든한 예비 사위를 보며 그 무거운 책임감을 조금 내려놓을 수 있었다. 우리 딸이 이제 우리 없이도 잘 살겠구나, 홍군이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 같은 생각들을 하셨다.

손예진, 정우성 주연의 영화 <내 머리속의 지우개>가 떠오른다. 딸과 철수의 결혼을 결사반대하던 아버지가, 딸이 빗속에서 쓰러지자 번쩍 들어서 병원으로 뛰어가는 철수를 보고는 결국 사윗감으로 인정하던 장면.

나의 부모님은 일찌감치 홍군을 사윗감으로 허락하시긴 했지만, 그래도 아마 딸을 보내기까지 많은 걱정과 알 수 없는 섭섭함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셨을 것이다. 하지만 그 날부터 부모님은 그에게 마음을 더욱 활짝 열 수 있었다. 걱정보다는 든든함이 앞서게 되었고, 섭섭함보다는 편안한 마음이 더 커졌다.

그 덕이었을까. 4개월 뒤 버진로드에서 아빠는 내 손을 홍군에게 건네며 눈물을 흘리지 않으셨다. 그를 지켜보는 엄마 또한 울지 않으셨다.






* 응급실 기억(1) 보러 가기



표지 사진/ 아빠와 걷던 버진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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