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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정 Feb 02. 2021

약봉지를 잃어버렸다. 아니, 잊어버렸다.

#7 너 덕분에

 내가 처음 정신의학과의 문을 두드린 건 9월쯤이었다. 계약직이었던 직장에서 계약 만료를 앞두고 불안 장애가 심하게 찾아왔다. 평범해 보였던 일상생활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고, 나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하고 싶었다. 그때 생각해낸 가장 쉬운 방법이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일이었다. 다행히 그 전문가는 상대의 아픔을 잘 어루만질 줄 아는 사람이었고 나는 금방 치유되는 듯 보였다.

 그 후로 10개월 동안 2주에 한 번씩 상담을 받고 약을 먹었다. 의사 선생님은 원래 정신과 약물 치료는 아무리 짧아야 1년이니 길게 보고 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처방받은 약을 먹으면 슬프지도 불안하지도 그렇다고 좋지도 신나지도 않은 무감정에 가까운 상태가 되곤 했다. 그 덕에 편하기도 했지만 종종 나 자신을 잃어버린 기분이 들기도 했다. 특히 글이 잘 써지지 않았다. 내가 아닌 3인칭의 시점에서 남의 이야기를 쓰는 것만 같았다. 임의로 약을 끊었다가 또다시 열심히 챙겨 먹는 날이 반복되었다. 퇴사를 함으로써 불안증을 일으키는 직접적인 요인이 사라진 데다가, 치료까지 받으니 제법 잔잔하게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무언가가 나의 감정을 다시 요동치게 만들었다. 바로 강아지였다.

 언제나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에 올라오는 강아지들을 보며 귀엽다고, 사랑스럽다고 말해왔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하는 나의 말투와 표정이 점점 바뀌기 시작했다. 귀여운 걸 보며 행복해하던 이전과는 달리 얼굴이 점점 괴로움에 일그러졌다. 화면 속의 강아지를 직접 만질 수도, 예뻐할 수도 없다는 게 이유였다. 나에게도 반려견이 있었으면 했다. 복실복실한 털을 쓰다듬고 동그란 코에 뽀뽀를 해주고 배를 살살 긁어주고 싶었다. 그런 생각들에 사로잡힐수록 나는 점점 더 강아지에 집착하게 되었다. 유기견 정보가 있는 포인핸드라는 앱에 시도 때도 없이 들어가서 가여운 강아지들을 보느라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썼다. 그러다 입양하고 싶은 강아지가 생기면 밤에 잠도 자지 못한 채 가슴앓이를 했다. 그 강아지가 우리 부부와 함께 사는 상상을 하며 즐거워하다가 이내 내가 데려올 수 없음에 속이 쓰라렸다. 그 사이 입양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할 때면 온 마음 다해 축하해주지 못하는 나 자신을 미워했다. 감정의 소용돌이에 내가 걸려들어서 깊이, 더 깊이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 마음을 달래러 유기견 봉사에 갔지만 사태는 더 심각해졌다.

 그동안의 치료가 도루묵이 될 정도로 정신 건강이 나빠졌다. 툭하고 건드리기만 해도 눈물이 뚝 떨어지는 날들이 반복되었다. 왜 이렇게까지 포기가 안되는지 나로서도 의문이었지만, 강아지를 입양하지 않으면 끝나지 않을 전쟁이라는 게 시간이 지날수록 확실해졌다. 이 지경이 되도록 강아지를 입양하지 못했던 건 책임감 때문이었다. 한 생명을 책임지는 일이 그 얼마나 무거운 일인지 알았기에. 나와 남편은 ‘우리가 강아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해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둘 다 직장인이라는 것부터- 당시에 나는 일을 쉬고 있었지만 어차피 다시 출근할 운명이었으므로- 이미 틀려먹었던 것이다.

 이성과는 다르게 마음 앓이는 더 심해져서 이러다 정말 큰일 나겠다 싶을 때쯤, 결국 내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달콩이를 입양했다. 인절미 색깔에 수제비같이 생긴 귀를 팔랑거리는 달콩이를 내 품에 안고 집에 데리고 왔다. 드디어 만질 수 있고, 뽀뽀할 수 있고, 안을 수 있는 강아지가 내 앞에 있었다. 달콩이가 보석 같은 눈을 깜빡거릴 때마다 나는 진정으로 심장이 저릿저릿했다. 어렵게 입양했기에 이 생명체가 더욱 소중하고 예뻤다.

 강아지와 가족이 되고 싶다고 매일같이 울던 기억은 금세 잊혀졌다. 3개월짜리 아기 강아지를 키우는 일은 상상 그 이상으로 힘들어서 그 외의 다른 것들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닥치는 대로 잡고 뜯는 이갈이 시기에는 내 시선이 닿지 않을 때 어디서 무엇을 뜯을지 마음을 졸여야 했다. 사회화 시기를 놓칠까 봐 산책을 나가면서도, 아직 접종이 다 끝나지 않아서 면역력이 약한 달콩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걱정했다. 어릴 때 버릇이 잘못 들까 봐 훈련도 열심히 시켜야 했는데, 이 귀여운 생명체에게 “안돼!”라며 단호한 목소리를 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갈이가 너무 힘들었는지 식탐이 엄청난 달콩이가 사료를 못 먹을 때는 하루 종일 속이 상해서 어쩔 줄 몰라했다.

 그중에서도 최고의 걱정은 (이전 글에서도 썼듯) 배변 문제였다. 달콩이가 실외 배변을 하게 되면서 실내에서 배변을 참기 시작한 뒤로 나는 매일같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달콩이가 집에서 쉬야 끙아를 해주었는데, 나는 그날 너무 기뻐서 마구 소리를 지르고 남편에게 달려가 그의 두 손을 맞잡고 제자리에서 방방 뛰기에 이르렀다. 로또에라도 당첨된 사람처럼 격하게 웃다 말고 나는 그에게 말했다.
“아니, 오빠. 내 강아지가 집에서 똥 싸준 게 이렇게 행복할 일이야? 이러니까 내가 우울증에 걸릴 틈이 없어요! 달콩이가 밥만 잘 먹어줘도, 쉬야만 잘해줘도 이렇게 사람이 행복해지는데!!! 우울할 틈이 어디 있겠어!!!”

 남편과 함께 깔깔깔 웃다가, 갑자기 방금 지나간 나의 말을 되짚어보고 싶어 졌다. 내 입에서 나온 우울이라는 단어가 다소 어색하다고 느꼈다. 뒤이어 무언가가 마음에 턱, 켕겨왔다. 무엇이 걸리는 건지 곰곰이 생각했다.
 ‘아, 맞다...!’
 
 나는 부엌에 있는 검은색 수납 트레이로 다가가 정리가 되지 않은 바구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두 번째 칸에서 익숙한 약봉투를 찾아냈다. 나의 손가락 사이에서 바스락 소리를 내는 이 종이봉투는 안에 약봉지가 한가득 들어서 뚱뚱했다. 병원에서 받은 한 달 치의 약이었다. 마지막으로 병원에 갔을 때 나는 선생님께 이야기했다. “강아지를 키우고 싶은 마음이 제 뜻대로 제어가 되지 않아 힘들어요”,라고. 그 후로 나는 이 약봉지의 존재조차 잊어버린 채 몇 달을 지냈다. 달콩이가 세차게 흔드는 꼬리에, 나도 모르게 최면이 걸려버린 탓에.

 세 식구가 함께 있을 때 나는 종종 이유도 없이 웃는다. 특히 남편과, 그런 남편의 눈망울을 닮은 달콩이가 함께 나를 쳐다볼 때면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을 느낀다. 달콩이를 행복하게 해주는 일은 앞으로도 꾸준히 해나가야 할 우리의 숙제일 것이다. “하지만 너는 그 어려운 숙제를 이미 해냈어. 엄마 아빠를 행복하게 해주고 있으니까.”라고, 달콩이에게 꼭 이야기해주고 싶다.




달콩과 우리, Mamiya RB67 뷰파인더를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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