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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정 May 24. 2021

어릴 적 그 친구는 말했지

어릴 적 그 친구는 내게 말했지.


“이거 비밀인데...

저 놀이터 옆에 있는 철문 알지?

거기 문을 열어서 지하로 내려가면 신비한 세계가 펼쳐져.

바닥과 천장에 큰 구멍들이 여러 개 나있고,

그 구멍으로 마법사들이 왔다 갔다 해.

허공에는 동물들이 둥둥 떠다니기도 하고.

아, 그 구멍에 잘못 빨려 들어가면 큰일 난다?

엄청 위험한 곳이야.

그리고 있잖아.

이건 정말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난 거기 있는 동물들이랑, 마법사들이랑

대화도 할 수 있다?

거기에 들어가려면 비밀번호가 필요하거든.

아무나 못 들어가는 곳이라 이거야.

근데 한 번 들어가게 되면

그들만의 언어를 자연스레 습득하게 되는 거야.

내가 어떻게 거길 들어가게 되었냐면 말이지.

정말 큰 용기가 필요했어...”


처음에 의심으로 가득 찼던 나의 눈은 점점 휘둥그레졌어.

내가 묻는 모든 질문에 친구는 하나도 막힘이 없이 대답했기 때문이지.

진한 쌍꺼풀을 가진 똘망한 아이였다는 사실만을 제외한다면

그 친구의 이름이나 얼굴은 잘 기억나지 않아.

친구의 집에 놀러 갔던 기억은 흐릿하게 남아있는데,

진한 남색의 벽지로 둘러싸인 친구 방의 불을 끄면 스티커 별들이 아주 많이, 찬란하게 빛났던 것 같아.

그 사이에 그녀의 큰 눈도 함께 빛나고 있었지.


지금 떠올려보면, 그 친구는 엄청난 이야기꾼이었던 게 아닐까.

가끔은 놀랄 만큼 자세했던 친구의 설명이

마치 영화가 상영되듯 또렷하게 눈 앞에 펼쳐져서,

그럴 때면 진짜로 그 공간이 있었던 건 아닐까 생각해.

그 친구가 혹시 그곳으로 들어가서 사라져 버린 건 아닐까, 하고.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길을 가다 철문을 발견할 때면 괜히 이상한 상상을 해.

친구가 그 안에서 마법사 모자를 쓰고는 동물들과 웃고 있는 상상.


엉뚱하다고 생각하다가도

왠지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이 안 들어.

나 과학, 이성, 이런 거 꽤 따지는 사람인데.

가끔 어떤 것들은 이처럼 나도 모르게 믿어버리게 돼.


친구는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고 있을까?

그 공간 속에서 사라져 버린 게 아니라면,

그 친구가 소설가였으면 좋겠다고, 나는 생각했어.

그런 이야기를 쓸 수 있다면

많은 이들이 그냥 믿어버릴 거야. 나처럼 말이야.






커버 사진/ 필름 카메라 OLYMPUS PEN EE-3로 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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