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12년 차 친구이자 언니인 초이가 있다. 얼마 전 그녀는 다시 한번 MBTI 검사를 했다고 했다. 아무리 여러 번을 해도 ENFP가 나온다며, ENFP 성향을 가진 사람의 머릿속에는 긍정 회로가 쉴 새 없이 돌아간다고 말해주었다. 분명 맞는 말이었다. 나랑 닮은 점이 많은 초이에게 종종 동질감을 느끼다가도, 그녀의 긍정 마인드는 상상을 초월할 때가 많아서, 그 부분만큼은 내가 절대 넘을 수 없는 벽이라 여기곤 한다. 그래도 나는 초이가 뛰노는 긍정의 꽃밭에 자주 기웃거린다. 내 머릿속 회로를 그녀처럼 바꿀 수는 없지만 그녀가 아낌없이 꺾어주는 꽃들을 부지런히 모아둔다.
돈으로 사람의 가치를 매기면 안 되겠지만 최근 직장인으로서 나의 가치는 최저치를 찍어버렸다. 이직한 직장에서 생각지 못한 문제로 최저 시급을 받게 되었고, 담당자는 그 상황을 책임져주지 않았다. 게다가 또 다른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그 최저 시급마저도 받지 못하게 되었다. 석사 졸업에 직장 경력 5년 정도를 가진 사람이 100만 원 언저리의 월 급여를 받은 것이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서 한 달을 꽉 채워 일했다. 그리고 이런 대우를 받으며 일하기에는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결국 그만두었다.
작년 여름에도 나는 실직자였다. 무더운 더위에 집에서 땀을 흘리며 보냈던 나날들을 생생히 기억한다. 왜 하필 또 여름인 거야, 마지막 날 회사를 나오는 길에 나는 툴툴거렸다. 뙤약볕이 금시에 온몸을 달구고 있었다. 아무리 말이 안 되는 상황일지라도 퇴사를 결정하기까지는 쉽지 않았다. 큰 용기와 결단이 필요했다. 얼마를 받든 어떤 부당한 대우를 받든 버텨보려고도 여러 번 마음을 먹었었다.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경력과 당장의 실직, 더 나아가 앞으로 일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두려움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버틴다면 개선될 수 있을 상황인지 수십 번 고민해보았지만 버틸수록 더 악화될 거라 판단했다. 단단히 잘못 끼워진 단추들을 모두 풀어서 다시 끼울 자신도 없었다. 그곳을 그만둔 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럼에도 내면에서는 나 자신을 탓하는 목소리가 종종 들려왔다. 그래도 버텨봤어야지. 너는 도망친 거야.
다시 어둠 속에 파고들 나를 걱정하며 초이는 일단 가벼운 아르바이트부터 시작해보길 권했다. 그녀의 제안에 나는 머뭇거리며 시간이 필요하다 말했다.
“온정아, 나는 네가 주춤하다가 나중에 아무것도 못했다고 자책할까 봐 그게 걱정인 거야. 네가 잠깐 쉬려고 한다 해도 막상 맘 편히 쉬어지지를 않으니까. 정말 시간이 필요한 거라면, 제발 잠깐이라도 돈벌이나 미래 걱정 없이 쉬었으면 좋겠어.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단순 노동하면서 용돈이라도 벌면 자신감도 생기지 않을까?”
“언니. 사실 자꾸 그런 생각이 들어요. 내가 여기도 버티질 못했는데 과연 다른 데를 간다고 버틸 수 있을까. 나는 과연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인가. 회사든, 알바든, 앞으로 뭐든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
“그런 게 어디 있어. 온정아, 뭐든 시작할 때보다 끝낼 때 더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법이야. 부당한 곳을 박차고 나올 용기가 있다면 시작할 용기도 분명히 있어. 연애할 때도 만나는 것보다 헤어지는 게 더 어려운 거 몰라?”
우와… 역시. 초이의 말을 들으며 웃었다. 내가 했던 생각과는 너무도 달랐다. 내 선에서 할 수 있는 긍정적인 생각은 이 정도였다.
‘이미 바닥까지 찍어봤으니까, 이제 올라갈 일만 남았어.’
사실 이것도 많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한 거라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초이의 말을 듣고 보니 바닥을 찍었다는 생각 자체에 이미 부정적인 부분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녀의 차원이 다른 긍정에 이렇게 또 한 수 배웠다. 끝을 해냈으니까 시작이야말로 분명히 할 수 있어. 끝이 더 어려운 거니까… 그 말을 곱씹으며, 그 어려운 일을 해낸 나를 떠올렸다. 부당한 상황에서도 마지막까지 있는 힘을 쥐어짠 나를 생각했다. 마음에 용기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한 유튜브에서 박세니라는 심리학자는 말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들 하잖아요? 그 말 헛소리예요. 인간이라면, 실패를 하고 나면 또다시 실패할 거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되어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진짜 성공의 어머니는 작은 성공이에요.”
일단은 아주 작은 성공들을 목표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초이가 추천해 준 하루 세 시간짜리 아르바이트도 조만간 시작해보기로 했다. 단순 노동이고, 짧은 시간이니 열심히만 한다면 초이 말대로 자신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카페로 나와 글을 쓰고 있다. 더위로 힘들거나 가라앉으려 하면 즉각 샤워를 한다. 시원한 물로 복잡함과 찜찜함을 씻어버리고 개운하게 다시 시작한다. 하루를 부지런히 보내는 것만으로도 작은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는 걸 깨닫고 있다. 마지막 출근 날이 다가올수록, 아침에 눈 떴을 때 출근할 곳이 없을 앞날을 무척이나 두려워했던 나다. 그러나 생각의 전환만으로 큰 활력이 생겼다. 이런 걸 긍정의 힘이라고 하던가. 초이의 꽃들을 부지런히 그러모아둔 보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