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서른두 살의 여름. 종합 건강 검진을 받았다. 나의 오른쪽 가슴에 2cm에 달하는 종양이 있다고, 미끄덩한 젤 위로 초음파 프로브를 능숙하게 굴리시던 선생님께서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하셨다. 모양은 순해 보이지만 크기가 워낙 크니 전문 병원에 가보는 게 좋을 듯하다고도 덧붙이셨다. 바로 다음날 유방 외과로 가서 조직 검사를 받았다. 마취 덕분에 두꺼운 바늘로 가슴을 뚫고 조직을 떼어내는 동안 별 아픔은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그 틈새로 온갖 두려움들이 나의 마음을 뚫고 들어와 심장을 뒤흔들어놓았다.
3일 뒤 결과가 나온다고 했다. 하필 검사를 받는 동안 엄마에게 부재중 전화가 와있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전화를 걸자 엄마가 어제 종합 검진은 잘 받았냐고 물었다. 결혼을 한 뒤로는 좀처럼 사생활을 치밀하게 묻지 않는 엄마인데. 그날따라 질문이 자꾸만 꼬리를 물었다.(예전에 <엄마에겐 독심술이 있나 봐>라는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정말 맞는 말인 것 같다.) 나는 오후 검진이라 종일 밥을 굶느라 힘들었다는 둥, 다녀와서 먹고 자느라 연락을 못했다는 둥 횡설수설 괜한 말들만 늘어놓았다. 조직검사의 충격과 긴장이 풀릴 새도 없이 엄마에게 거짓말을 하는 일은 영 쉽지가 않았다. 나의 목소리가 아슬아슬하게 떨렸다.
별안간 엄마는 내가 고등학생 때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너 위 내시경 처음 받았을 때 기억나? 엄마 그때 너 지켜보면서 엄청 울었잖아. 너 어제 검진받는다니까 괜히 그때 생각이 나서 마음이 좀 그랬어.”
참아오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빠르게 얼굴을 닦아내고는 “에이, 엄마. 나 그때 이후로 10년 넘게 매년 내시경 받아온 내시경 장인이라구. 아니, 어차피 수면 내시경이라 잠만 자면 끝나는데 뭘 걱정을 해요.” 호탕한 척 이상한 웃음소리만 내다가 급히 전화를 끊었다. 침대에 누우니 온 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불어 터진 면발처럼 온몸이 흐물흐물해지고 손가락에는 힘이 안 들어갔다. 그대로 몇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눈물이 이따금씩 또로로 흘러내리다 귓바퀴 속을 가득 채웠다.
고등학생 때 무엇을 먹어도 소화를 못 시켰다. 시계에 건전지를 끼워 넣듯 매일 빈 속에 초콜릿을 넣으면 하루가 째깍째깍 흘러갔다. 속 쓰림과 소화 불량 증세가 갈수록 심각해지자 결국 엄마 손을 잡고 동네 내과에 가게 되었다. 그 병원의 공기를 지금도 나는 잊지 못한다. 하얀색 벽에 각종 포스터들이 붙어있었고, 소독약이나 가루약 냄새가 은은하게 풍겼다. 진료실에서 선생님께 증상들을 설명했다. 선생님은 증상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여러 가지 질병들을 설명하며, “적은 확률이긴 하지만 위암일 수도 있고요.”라고 말씀하셨고, 스쳐 지나가는 그 말은 나를 움찔하게 했다. 그러나 막상 내시경 날이 올 때까지도 크게 두렵지는 않았다. 약간 긴장했을 뿐 모든 일에 그저 무덤덤했다.
그때와 현재가 묘하게 겹쳐졌다. 이번에는 온갖 상상들을 확장하느라 머릿속에 공간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결과가 나오기까지 기다림의 시간은 길었고 수많은 ‘혹시’를 낳았다.
사실 중고등학생 시절부터 나는 종종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위염을 달고 다녔던 이유도 정신이 건강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땐 워낙 나 자신을 지킬 줄 몰랐다. 공부, 경쟁, 인간관계. 그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죽음이 이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해결책이라 믿었기에 자주 그것에 대해 생각했다. 그때는 두려울 게 없었다. 가장 중요한 나의 의지가 쏙 빠져버린 목숨인지라 우연히 죽는다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씨앗을 빼버린 아보카도처럼 나의 중심은 뻥 뚫려있었다.
어두운 시간을 겨우 극복하고 난 뒤에는 오히려 죽음이 두려워져서 죽음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어떻게 지켜낸 목숨인데, 이제는 절대 놓칠 수가 없었다. 평소에는 괜찮다가도 스트레스가 심해질 때면 불안증이 따라왔다. 가만히 서있다가도 빠르게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랐고, 밤길을 걷다 보면 날 마주 보고 다가오는 모든 사람들이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예민했고, 종종 움찔거렸고, 두려워했다. 옛날 옛적에 하늘이 무너질까 봐 걱정하느라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는 사람이 있었다던데. 나도 딱 비슷한 모양새였다. 그렇지만 이런 불안함이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엉뚱하게도 그런 순간들에서 내 삶이 소중해졌다는 걸 느꼈으니까.
최근에는 코로나19라는 전염병으로 인해 의도치 않게 죽음에 대해 자주 생각했고, 고작 가슴속에 있는 순하게 생긴 혹 덩어리 때문에 또다시 그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나와는 멀 거라 생각했던 일들이 혹시 나의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세상에 아프고 싶어서 아픈 사람이 대체 어디 있겠냐만은, 목숨을 가볍게 생각했던 옛날의 그 시절과 대비되어, 나는 혹여나 아프게 될까 봐 지독히도 두려웠고, 그러니까, 정말 이 삶을 잘 살아내고 싶었다. 예전보다 살아야 할 이유가 훨씬 많아졌으니까.
베개에 머리를 대면 금세 커어- 소리를 내며 잠드는 남편도, 검사 결과가 나오기 전날에는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해졌지만 묻지 않았다. 다음날 우리는 손을 잡고 함께 병원을 찾았다. 진료실 문을 열고 인사를 드리기도 전에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다행히 암은 아니에요.” 우리는 자리에 앉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양성 종양이지만크기가 커서 제거 수술은받기를추천하셨다.조직 검사와 비슷한 방식이며 간단한 수술이라고 했다. 조금만 고민해보겠다고 하고 병원을 나섰다.
나는 자꾸만 나도 모르게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살기 위해 생각한다. 그만해야 하는데, 멈추어야 하는데. 손톱 거스러미를 물어뜯는 오래된 버릇처럼 고치기가 쉽지 않다. 죽음에 대해 무덤덤하던 학창 시절의 나와, 혹시 우연히라도 죽음에 가까워질까 봐 두려워하는 현재의 나. 그 괴리가 너무 커진다고 느낄 땐 억지로라도 냉철해지려고 노력한다.그래서 얼마 전에는 장기 기증 희망등록을 신청하기도 했다.두려움보다는 현실을 보고 싶어서.
인간 앞에는 삶이 주어지게 마련이고 그 끝이 언제일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하루에 충실하며 살아가는 것이 삶의 미덕일 것이다. 수술이 조금 무섭긴 해도, 올해 안에가슴속의 혹을 떼어내기로 했다. 그러고 나면 마음속 두려움의응어리들도 함께 떨어져 나가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