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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정 Jan 28. 2022

이상형과 산다는 것

 낯 뜨거운 남편 찬양글인 만큼, 글 사이에 괜스레 정신 사나운 농담 넣었음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




 20대 때 나의 이상형은 한결같이 '똑똑한 사람'이었다. 천재를 만나고 싶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나보다 두뇌 회전이 빠른 사람을 만나길 바랐다. 똑똑해지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결국 성공하지 못한 나였으니, 우러러볼 대상이라도 옆에 두고픈 마음이었던 것 같다. 친구들과 이상형의 외모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한참 고민하다 내린 결론은 이거였다.

 "공부 잘하게 생긴 사람이 좋아."


 나의 남편 홍군은 공부를 잘하게 생긴 사람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제법 총명한 사람이다. 세상에 홍군보다 똑똑한 사람은 널리고 널렸겠지만, 내 눈에는 홍군이 가장 똑똑해 보인다. 홍군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똑똑한 사람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아우라를 나 똑똑히 보았다(똑똑똑똑…). 그와 대화를 하다 보면, 숨겨볼래야 숨길 수 없는 박학함이 빼꼼 고개를 내민 채 내게 손을 흔들곤 했다. 홍군과 화학 계열의 전공자끼리만 알아들을 수 있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는 날도 많았지만, 사실 그중 40퍼센트 정도는 전부 이해하지 못해서 한 박자정도 늦게 웃을 때가 많았다. 그럴 때 창피할 법도 한데, 홍군이 가진 전공 지식에 감탄하느라 기분이 무척 좋았으므로 부끄러운 마음이 들 겨를이 없었다.


 연애할 당시 홍군은 자신의 지식이 얕고 넓다고 했다. 그래서 막상 이야기하다 보면 바닥을 빨리 드러낼 거라고, 그게 자신의 부족한 점이라고 말했다. 연애에서 결혼까지 함께한 지 7년이 다 되어가지만 나는 아직 그의 바닥을 본 적이 없다. 홍군과 나는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인데, 가끔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머릿속이 찌릿하는 걸 느낀다. 그동안 무위도식하며 탱자탱자 쉬고 있던 분야의 세포가 자극을 받는 순간인 것이다. 나는 그저 예사로운 서두를 던졌을 뿐인데 그는 밥 먹다 말고 인터넷의 백과사전을 열심히 뒤져보기도, 혼자 골똘히 수학 계산을 하기도 한다. 그가 잠시 다른 세계에 있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내가 이걸 왜 하고 있었지? 미안.”하고 머쓱한 표정을 지으면, 나는 그 순간 말하게 되는 것이다. “아냐 아냐. 오빠는 이래서 멋있어.”


 전공 살리기에 실패한 나와 달리, 남편은 전공을 잘 살려서 화학을 연구하고 제품을 개발한다. 자연대 출신답게 남편의 화학 지식은 기초부터 탄탄히 쌓여있다는 사실을 종종 깨닫게 되는데(나는 공대 출신이라 그렇지 못하다. 물론, 공부 못 하는 나를 합리화하려는 핑계에 불과하다.), 가지고 있는 지식을 실생활에 활용하는 역량도 뛰어난 편이라 회사에서도 인정받곤 한다.

 그런 홍군의 모습을 보며 그는 전공과 정말 잘 맞는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회사에서 노력을 인정받고, 인사고과를 아무리 잘 받아도 홍군은 울적해할 뿐이었다. 안정적인 방향만을 추구하고 발전이 없는 회사는 그와 맞지 않았다. 게다가 남편이 화학 관련 일을 잘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에게는 ‘하고 싶은 일’이 따로 있었다. 바로 프로그래밍이다.

 3년 전부터 홍군은 짬짬이 코딩 공부를 한다. 회사 일이 유독 힘들었던 날에는 죽을 상을 하고 집에 돌아오는데, 컴퓨터를 켜한참 동안 알 수 없는 글자들을 두드리고, 미국의 명문대 강의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거나, 알고리즘이 어쩌고, 프로그래밍이 저쩌고 하는 책들을 읽다 보면 찌푸렸던 그의 인상이 점점 매끈하게 펴지곤 한다. 회사 일을 끝내고 몇 시간씩 공부를 하면 피곤함이 배가 되어야 할 텐데, 컴퓨터를 바라보는 홍군의 표정은 오히려 훨씬 똘망똘망하고 가볍다. 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의 나는 좋아하는 연예인을 바라볼 때보다도 더 흐뭇한 표정을 고 있다.


 그는 부지런히 공부하며 이직을 꿈꾼다. 그러면서도 자꾸만 “내가 너무 욕심쟁이인 건가. 배가 불러서 이런 건가.”와 같은 의구심의 화살을 자신에게 겨누고는 괴로워한다. 현재의 좋은 조건을 두고는 꿈을 좇는 자신의 본능에 알 수 없는 죄책감을 느낀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기업에서, 그저 만족하고 다니면 될 일인데. 왜 이렇게 나는 딴생각을 품는 걸까." 홍군이 그런 말을 할 때면 나는 또 한다. 그런 사람이라 오빠가 멋있는 거야,라고.

우리 30여 년 간 남들과 똑같이 살려고 무던히 노력했잖아. 우리는 꿈이 있는 사람들이니까, 그걸 좇으면서도 한 번 살아보자. 오빠가 내 꿈을 이루게 응원해주고, 그걸 누리게 해 준 만큼 나도 오빠가 그럴 수 있게 돕는 사람이 되고 싶어. 훗날 내가 왜 그랬을까, 후회하고 현실로 돌아오게 되더라도 일단은 최대한 꿈 근처까지라도 가보자. 서로가 서로를 응원하니까. 현실에 남든 꿈을 좇든, 어떤 선택을 하든 간에 우리 둘이 ‘함께’ 책임지는 거야. 어떻게든 우리가 조금이라도 더 행복해질 수 있는 방향으로, 우리답게 살 수 있는 방향으로 가보자. 으쌰으쌰 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발전시켜나가는 사람. 나는 이상형과 함께 살고 있다. 끊임없이 공부하는 그의 모습은 여전히 근사하다. 고생길로 가는 길이라 해도 우리가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 보고 싶다. 멋진 모습을 계속 지켜보고픈 나의 사심도 조금 담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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