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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정 Feb 21. 2022

그 시절, 포카리 스웨트

 오랜만에 과음을 했다.


 원체 술을 좋아했으나 언제부턴가 맥주를 한 캔만 마셔도 머리가 아파 잠에 들지 못했다. 두 캔 이상 마시면 다음날 온종일 숙취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술이 싫어지지 않았다는 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마시고픈 욕망을 꾹꾹 누르며 사는 게 일상이 되었다.

 마냥 착하게만은 살 수 없는 성질의 사람이 매일 착하게 살아가다보면 인내 게이지가 차곡차곡 쌓이게 마련이다. 그러니 가끔 한 번 씩 "에라, 모르겠다!" 모드가 발동하는 날이면 나도 나 자신을 어찌할 수 없다. 그날 고삐가 제대로 풀린 나는 다음날의 존재를 까먹어버린 사람처럼 마셨다.


 결과는 역시 처참했다. 머리가 아팠고, 눈동자에는 초점이 사라졌으며, 속이 울렁거려 견딜 수 없었다. 물도 마시기 어렵다고 느끼던 그때 문득 포카리스웨트가 생각났다. 곧장 포카리 스웨트를 사 와서 하루에 걸쳐 3리터를 몽땅 마셨고, 그 덕에 세 끼를 모두 챙겨 먹고 할 일도 할 수 있었다. 고마운 녀석이네, 하며 큼직한 페트병에 붙어있는 파란색 라벨 비닐을 만지작거리다 보니 갑자기 어렸을 때가 떠올랐다.

 기억이 흐릿한 걸 보니 아마 초등학생이나 중학생 때 정도였던 것 같다. 몇 년간 알 수 없는 두통에 시달렸다. 귀를 뚫으면 두통이 사라진다는 소문을 듣고, 아빠에게 쫓겨날 각오를 하고 귀를 뚫었지만 효과는 없었다. 엄마 손을 잡고 여러 번 병원에 갔다.



 나에게는 아무 병이 없었다. 잘은 몰라도 마음으로부터 온 아픔이라는 걸 은연중에 알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그토록 힘들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디가 어떻게 아팠는지는 아직까지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마음 한구석에서 시작된 고통이 턱관절을 뻐근하게 타고 올라가 관자놀이를 쥐어짜는 느낌이었다. 검사를 받아도 이상이 없고, 두통 외에는 다른 증상이 없는 나에게 의사 선생님은 조언해주셨다.

 "두통에는 이온 음료가 좋아요. 포카리 스웨트 같은 거, 자주 먹어봐요."

 그때부터 슈퍼를 지나 때마다 파란색 캔을 사서 마셨다. 역시 이렇다 할 효과는 없었지만 의지할 구석이 있다는 게 괜히 위로가 되었다. 달짝지근하면서도 은은한 과일 향 음료가 혀를 맴돌면 슬몃 기운이 나기도 했다. 두통과 포카리 스웨트는 나의 단짝 친구처럼 늘 붙어 다녔다.


 다행히 성인이 된 후로 원인 모를 두통은 사라졌다. 이제는 원인이 명확한 두통을 포카리 스웨트로 해결하고 있는 나의 꼴이 조금 웃기기도, 동시에 어린 시절의 내가 짠하기도 하다.

 "대체 뭐가 그렇게 힘들었니?"라고, 그때의 나에게 묻고 싶다. 너는 미래에 지금보다도 훨씬 어리석은 어른이 될 거라고. 두통을 돈 주고 산 뒤에 그 통증을 없애려 1.5리터 포카리 스웨트를 두 통이나 벌컥벌컥 마시는, 속 없는 어른이 될 거라고. 그렇게 철딱서니없이 살아보니 제법 행복하다는, 가장 중요한 사실도 전해주고 싶다.


 "그러니까 너무 근사한 사람이 되려고 애쓰지 않아도 괜찮아. 그저 잘 버텨줘. 관자놀이를 짓누르는 아픔을 포카리 스웨트로 잘 달래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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