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남편에게 "마아아안약에 아이가 생기면 말이야."라는 말을 심심찮게 한다. 마아아안약에 아이가 생긴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 네 식구가 잘 지낼 수 있을까? 아니, 거꾸로 생각해보자. 어떤 환경을 만들어 놓아야 우리가 아이를 낳아서 잘 키울 수 있을까?
사실 나는 결혼하기 전부터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다고 남편에게 말했었다. 그 이유를 이야기하자 남편도 진심으로 동의했고, 결혼한 지 4년이 넘었지만 우리에겐 여전히 아이가 없다. 그러니까 '마아아안약에'라도 아이가 있는 상황을 가정하는 지금, 이전과 비교하면 제법 큰 폭으로 심경이 변화한 셈이다.
때가 지났는데도 아이를 낳지 않는 우리를 보며 사람들은 말하곤 했다.
"늙어서 후회해."
"둘만 사는 거 평생 좋을 것 같지? 그거 다 한 때야."
"생명을 낳아서 키우는 게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데."
그들이 전하려는 뜻을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내가 아이를 낳지 않고 있는 이유는 그들이 생각하는 이유와 완전히 다르다. 아이가 없는 나의 삶을 누리고 싶어서, 나의 커리어를 포기하기 싫어서 아이를 안 낳는 게 아니다. "이 세상에 태어날 아이가 과연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기에 아이를 낳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I was born."
태어난다고 표현할 때는 수동태를 쓰지 않는가(너무 당연해서 'born'의 능동태 표현을 들어본 적 없을 정도).태어나는 건 자신의 의지로 하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태어나는 아이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살면서 나는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만약 선택권이 있었더라면 나는 태어났을까. 그런 물음에 "아니. 나는 태어나고 싶지 않았을 것 같아..."라고 답한 적이 훨씬 많다. 내 인생에 빛나는 순간들이 넘치고, 사랑을 많이 주고받고 살았음에도 그렇다. 그래서 더 문제다.
아무리 내가 최선을 다하고 사랑을 준들, 과연 아이가 행복할 수 있을까. 이 험난한 세상에서 아이가 무너지지 않고 잘 살아갈 수 있을까. 과연 나는 아이가 무너지지 않도록 든든한 지지대가 되어줄 수 있을까. 나를 왜 낳았냐고, 아이가 나를 원망하는 순간이 오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들이 끊이질 않는다.
이런 나의 걱정을 이야기했을 때, 어르신들은 둘째치고 나의 또래들조차 나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넌 걱정이 너무 많아. 왜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걱정해? 사람들은 그랬다. "내가 겪어봤으니까 그렇지." 그 정도로 대답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남편만큼은 나의 말에 온전히 공감했기에 나는 나의 가치관을 지켜나갈 수 있었다. 우리는 혹시 서로의 생각에변화가 있는지 자주 대화를 나누었고, 우리 둘 모두 최근까지도 여전히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다는걸 확인했었다.
그러던 우리의 마음에 달콩이가스며들었다.
강아지 입양을 결정하기까지도 우리 부부는 비슷한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었다. 과연 우리가 한 생명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YES"라는 답을 내리기 어려운 그 질문에, 결국 우리는 확신이 없는 상태로 달콩이를 입양했다. 대신 최선을 다해보자고 단단히 마음을 먹고서.
그렇게 달콩이와 함께한 지 2년이 지났다. 사람들의 말처럼, 생명을 키우며 나누는 교감은 고귀했다.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고 뿌듯함이며 행복이었다. "어떻게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 어느 노래의 가사처럼 나는 달콩이를 볼 때마다 말한다. 나는 너를 사랑해. 식상하지만 다른 표현으로는 대체할 수 없을 정도로 너를 너무나도 많이 사랑해. 시간이 갈수록 달콩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욱더 커져 가는 걸 느낀다. 누군가가 달콩이를 보며 "사랑받고 사는 티가 난다"고 말했을 때, 그 말이 내 가슴속에 오래 남았다. 맞아. 달콩이는 사랑받고 있어. 나는 생각했다.
달콩이가 지금 얼마나 행복한지는 잘 모르지만, 나와 남편의 넘치는 사랑을 분명히 느낄 거라고 확신한다. 그 과정에서 달콩이는 안정감과 행복을 느낄 것이다. '사랑을 주는 것만으로도, 또 우리가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이루어지는 게 있구나. 물론 맘처럼 안 되는 게 더 많지만. 그래도 되긴 되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우리는 뜻밖의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그 자신감이 "우린 한 생명을 행복하게 키워줄 수 있어!" 정도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여전히 달콩이를 키우는 일이 버거울 때가 많지만, 그래도 "우리도 노력하면 할 수는 있겠다." 정도로 생각이 바뀌었다.
달콩이를 처음 입양했을 때, 엄마는 절망에 빠진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낳으라는 애는 안 낳고 무슨 강아지를 입양했냐고. 이게 말이 되는 일이냐고. 사실 그때는 아이 계획이 0프로에 가까웠기에 달콩이를 입양한 거였고, 엄마의 말씀에도 틀린 건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내가 아이를 가질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엄마에게, 얼마 전 나는 이야기했다.
"그때 엄마가 왜 아이는 안 낳고 강아지를 데리고 왔냐고 저 혼내셨었잖아요. 엄마, 근데 달콩이를 키우면서 오히려 아이 생각이 조금이나마 생겼다니까요?"
정말 그렇다.
결혼하면 아이를 낳는 게 당연한 거니까, 다들 낳고 사니까, 같은 생각으로 얼렁뚱땅 아이를 낳고 싶지 않다. 이건 우리 부부의 꺾을 수 없는 고집이다. 아무리 옆에서 누군가가 아이를 낳는 중요함과 그 행복에 대해 열렬히 이야기해준다한들 나와 남편의 마음을 움직이긴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직접 달콩이를 키우며 우리의 마음은 조금씩 녹아내렸다. 좀 더 나은 환경이 없을까. 달콩이와 아이가 모두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려면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그런 고민을 처음으로 해보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집 구석구석에 온통 깔려있는 미끄럼 방지 매트를 보며, 다음 집은 주택이었으면 좋겠다거나, 주택으로 이사 가는 게 현실적으로 쉽지 않으면 아파트 1층에 사는 것도 고려해볼 만하겠다는 이야기를 남편에게 했다. 1층에 사는 건 절대 안 된다고 말해왔던 나지만, 아이와 강아지와 함께 살려면 1층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전 처음 생각했다. 층간 소음이나 달콩이 실외 배변 등을 모두 고려한다면 1층에 사는 게 장점이 될 수 있으니까.
만약 아이를 낳는다면 달콩이는 과연 어떤 반응을 할까. 아이와 달콩이는 친하게 지낼 수 있을까. 둘이 있는 장면은 얼마나 귀여울까. 이런 상상도 종종 한다. 다행인 건지 모르겠지만 달콩이는 섭섭할 만큼 질투가 없다. 달콩이 앞에서 다른 강아지와 뽀뽀를 해도 쳐다도 보지 않을 정도로. 그러니 아이를 질투하거나 자신을 봐 달라고 보채거나 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대신 육아하느라 산책을 못 가면 자기 쉬야 마려우니 나가자고 보채기는 할 것 같다. 역시 그런 걸 생각하면 정원 달린 주택이 필요한데.주택은 비싸고. 우리 부부 출근도 문제고. 그럼 어쩌지? 다른 방법은 또 뭐가 있을까? 그런 류의 고민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고민을 다 하고 낳으면 이미 늦는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요즘은 난임도 워낙 흔하니 일단 생긴 뒤에 고민하면 된다고. 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마음은 아주 느린 속도로만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달콩이가 있다.
삶에 냉소적이던 나와, 걱정이 많은 남편의 손을 매일 핥아주는 달콩이의 눈망울은 말한다. 날 보라고. 서툰 모양의 사랑도 이렇게 통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