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 돋친 나라도 사랑해줄래?

by 온정

20대 중반에 친구 손을 잡고 난생처음 사주를 보러 갔다. 주변에 심심풀이로 사주를 보는 친구들이 꽤 많았기에, 그 후기들도 워낙 번번이 들어온 나. 그들은 하나같이 이야기하곤 했다.
"아니, 분명 날 모르는 사람인데. 완전 내 얘기를 하시는 거야. 얼마나 소름 끼쳤는지 몰라!"

가는 길 내내 설레었다. 난 어떤 운명을 안고 태어났을까. 나도 무언가 내 인생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을까, 혹은 빛줄기라도 발견할 수 있을까? 그때의 나는 뭐라도 희망을 가질만한 건덕지가 필요했더랬다. 내 신분은 졸업을 앞둔 학생. 즉, 예비 취업준비생이었다.

잔뜩 기대하고 갔지만, 글쎄. 도움이 될만한 대답은 하나도 듣지 못했다. 아주머니께서 내게 어울리는 직업을 나열해주셨는데 지금 내 전공과는 참깨만치도 관련이 없었다.

'나는 운명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아닌가 보다.'

어차피 재미로 보러 온 것이니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사주 풀이가 모두 끝날 때쯤, 그 집에 어떤 남자분이 들어오셨다. 아주머니와 함께 사주 명리학을 연구하고 있다며 본인을 소개하던 아저씨. 서비스로 우리의 이름을 풀이해주겠다고 하셨다.

아저씨는 화이트보드에 내 이름 석자를 큼지막하게 쓰시고는 풀이를 하셨다. 그리고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씀하셨다.

"온정 씨는 장미꽃이네."

"네...? 장미꽃이요?"

꽃이라니 이게 웬 말이냐. 그것도 꽃 중에 가장 아름다운 장미꽃. 듣자마자 기분이 좋았다. 아저씨는 뒤이어 이야기하셨다.

"꽃잎이 너무 예쁘고 매혹적이야. 그래서 주변에 벌들이니 나비들이니 엄청나게 꼬여든다고. 그런데 있잖아, 막상 가까이 다가가면 그 날카로운 가시에 찔려버리는 거야. 그래서 결국 다 도망가버리고 마는 거지."

발끝부터 목까지 올라오는 소름에, 난 어깨를 으쓱 들어 올리며 온몸을 파르르 떨 수밖에 없었다. 이 아저씨가 내 인생을 맞춰서라기보다는, 그 비유가 너무나도 정확해서 말이다. 가시 돋친 장미꽃이라니.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난 어렸을 적부터 항상 인기가 많았다. 겉으로 보기에 잘 웃고, 착하고, 둥글둥글했기에. 하지만 사실 속은 그렇지가 못했다. 아저씨 말대로 가시가 가득했다. 항상 모난 마음을 지니고 살아왔다. 친구들에게는 그 가시를 어느 정도 잘 숨기고 지냈다. 하지만 연인에게는 그러지를 못했다. 아마 연애를 해본 모두가 알 것이다. 연인과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서로의 상태를 공유한다. 그래서 친구 앞에서는 본인을 어느 정도 절제할 수 있지만, 연인 앞에서는 점점 그게 어려워곤 했다.

툭하면 찾아와 문을 똑똑 두드리는 우울감, 사소한 한마디에도 뚝 떨구는 눈물, 툭 건드리면 펑 터질 것만 같은 예민함, 바닥과 손뼉이라도 칠 기세로 낮은 자존감... 상대방은 나를 알아가면 갈수록 지쳐갔다. 처음부터 이런 사람인 줄 알고 만났으면 모를까. 나는 깊게 알수록 피곤한 사람인 게 분명했다.

이런 연유로 난 종종 상처 받았다. 그리고 내 인기가 진심으로 싫어졌다. 내 껍데기만 보고 좋다고 달려드는 남자들을 불신했다. 본인들이 만들어놓은 틀에 날 가둬놓고, 그 틀을 벗어나는 순간 실망하게 될 그들을 미워했다. 어차피 만나면 다 똑같을 텐데 뭘. 진짜 내 모습을 알면 마음이 떠날 텐데 뭘. 신뢰하지 못해 피곤한 연애를 많이 했다.

그러던 나에게 그가 찾아왔다. 참으로 좋은 사람 같았다. 이 사람에게만큼은 정말이지 상처 받기가 싫었다. 그래서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때부터 횡설수설 나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가 실망하고 떠나버린다면 인연은 거기까지인 거니까. 차라리 깊게 사랑에 빠져버리기 전에 확실하게 해 두자.

- 내 진짜 모습을 알고 나면 실망할지도 몰라요.
- 내가 겉으로 보이기엔 밝아 보이지만 사실 굉장히 어두운 사람이에요.
- 지금은 처음이라 다 예뻐 보이겠죠. 하지만 콩깍지는 어차피 벗겨질 수밖에 없을 거예요.

지금 돌아보면 온갖 부정적인 이야기들을 참 많이도 했더랬다. 이제 막 피어오르는 사랑의 간질간질한 기분만 만끽해도 모자랄 시간들에 말이다. 그럼에도 그는 나를 넘치도록 사랑해주었다. 음엔 그 사랑이 조금 부담되기도 했다. 사랑을 많이 받은 만큼, 나중에 변했을 때 받는 상처는 더 클 것이기에. '사람 마음은 어쩔 수 없이 변한다'는 전제는 이미 내 마음 깊이 말뚝 박혀있었다. 그 말뚝은 그가 아무리 사랑이라는 망치로 두드려보아도 빠져나오지 않았다.



나의 끝없는 두려움에도, 그는 한없이 날 사랑해주었다. 믿음의 탑은 점점 더 쌓여갔다. 결국 걱정의 벽은 점점 더 허물어졌다. 왠지 내 작은 손에 힘들게 움켜쥐고 있는 상처들을, 그의 큰 손에 나누고 싶어 졌다. 나는 새끼손가락부터 하나씩 펼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에게 조금씩 보여주었다. 나의 상처. 나의 눈물. 나의 우울. 나의 아픔.

...... 그는 과연 나를 감당할 수 있을까? 정말 이렇게 다 꺼내보여도 괜찮은 걸까?


"응, 괜찮아."

는 항상 괜찮다고 말했다.

갑자기 울어도 괜찮아. 울다가 웃어도 괜찮아. 내 앞에서 무얼 하든 다 괜찮아. 사람이라면 다 그럴 수 있는 거야. 절대 이상한 거 아니야.

그는 항상 괜찮다고 말했다.
아무리 그 앞에서 히스테리를 부려도,
아무리 그 앞에서 내 치부를 꺼내어 보여도,
그는 마냥 괜찮다고 말했다.


그는 나의 빨간 꽃잎만 사랑하지 않았다. 내가 가진 모든 것, 그러니까 줄기에 돋친 날카로운 가시들마저 모두 안아주었다. 그 덕에 나는 이상 내 가시를 숨기려 노력하지 않게 되었다. 그의 앞에서 나는 나 자신, 그 자체로서 존재하게 되었다.


신이 처음에 장미를 만들었을 때, 사랑의 사자 큐피드는 그 장미꽃을 보자마자 너무나 사랑스럽고 아름다워서 키스를 하려고 입술을 내밀었다. 그러자 꽃 속에 있던 벌이 깜짝 놀라 침으로 큐피드의 입술을 톡 쏘고 말았다. 이것을 지켜보고 있던 여신 비너스는 큐피드가 안쓰러워 벌을 잡아서 침을 빼내버렸다. 그리고 그 침을 장미 줄기에 꽃아 두었다. 그 후에도 큐피드는 가시에 찔리는 아픔을 마다하지 않고 여전히 장미꽃을 사랑했다.

출처: 국립중앙과학관



“가시 돋친 너라도 괜찮아. 난 그저 너를 사랑할 뿐이니까.”




커버 사진/ 필름 카메라 X-300으로 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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