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방학 첫날 아침이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야 했던 아이는 방학을 만끽하겠다던 다짐을 지키려는 것인지 늘어지게 늦잠을 자더니 평소보다 두 시간은 늦은 시간에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눈을 뜨자마자 배가 고프다길래 아침으로 무얼 먹고 싶은지 물으니 오늘은 시리얼을 먹겠단다. 그릇과 숟가락, 시리얼이 차례차례 식탁 위에 놓였다. 이어 우유를 꺼내려고 냉장고 문을 열었는데, 이럴 수가! 누가 빈 우유통을 버리지 않고 냉장고에 넣어 둔 것처럼 2L짜리 우유통 바닥에 우유로 추정되는 액체가 아주 조금만 남아있다. 시리얼이랑 함께 먹기는커녕 그냥 마셔도 간에 기별도 안 가겠는걸? 하지만 걱정은 없다. 우리 아파트 1층에는 슈퍼마켓이 있으니까! 움하하하하하.
슈퍼마켓
슈퍼마켓. 우리는 그것이 영업을 시작하기를 얼마나 고대했던가.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로 이사를 온 것은 이 년 반 전의 일이었다. 당시, 건물 1층, 한눈에 딱 봐도 목 좋은 위치에 생필품을 파는 곳으로 추정되는 가게가 자리하고 있었다. 처음 집을 보러 왔던 날도, 그리고 우리가 이사를 오던 날도 간판은 붙어 있었지만 가게 내부의 불은 꺼져 있길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 그날들이 쉬는 날들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며칠을 지켜봐도 불이 켜지는 일이 없어 건물을 관리하시는 분께 여쭤보니 폐업을 했다는 거였다. 아, 좋다 말았네. 매일매일 급하게 필요한 물건이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내 집과 지척 거리에 슈퍼마켓, 하다못해 작은 편의점이라도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기쁨을 주는지. 귀갓길에 잠깐 들러 어느 날은 과자 한 봉지, 또 어느 날은 아이스크림 하나 물고 나올 수도 있고, 부엌에서 요리를 하다가 계란이 똑 떨어지면 후다닥 달려 내려가 계란 한 판 사 올 수 있는 편리함, 그 든든함과 기쁨! 그런데 네? 폐업이라고요?
그렇게 거의 일 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어느 날이었다. 한때는 손님으로 북적거렸을 가게 근처를 지나면서도 이제 더 이상 희망 어린 눈빛을 던지지 않은 지 오래였는데 그날만은 이상하게도 자꾸만 그쪽으로 눈길이 갔다. 뭐지? 뭐가 달라진 것 같은데? 아! 의미 없이 햇살에 바래만 가던 가게 간판이 사라진 것이었다. 순간, 내 머릿속은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간판은 왜 뗐을까? 새 간판을 달 생각인가? 그렇다면 혹시 다른 가게가 들어온다는 의미? 실제로 그로부터 며칠 후부터 가게 안에서는 뚝딱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 아파트 1층에 가게가 생기기를 학수고대하던 우리 가족의 가슴은 두근거리기 시작했고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아파트 관리인을 찾아가 지금 1층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물었다. 그리고 그의 대답은 할렐루야! 슈퍼마켓이 문을 열려고 준비 중이라는 것이었다! 신이 난 우리는 그것이 언제 문을 여는지 물었고 약 한 달쯤 후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한 달, 이제 딱 한 달만 기다리면 천국이 펼쳐진다.
슈퍼마켓과의 밀당
하지만 그때 우리가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여기가 두바이라는 것. 남편이 근무하는 사무실이 있는 건물 화장실 한 칸 공사하는데 믿을 수 없게도 거의 일 년이 걸렸다는 두바이, 집 앞 공원 초입 넓지 않은 공간에 2년이 다 되어가도록 가림막이 쳐져 있길래 얼마나 대단한 공사를 하는지 궁금했었는데 그것이 걷히고 나니 작은 바닥 분수와 보도블록만이 깔려 있어 정말로 그 긴 시간 동안 고작 이걸 한 건지 궁금하게 만드는 업그레이드된 만만디 정신을 보여주는 바로 그 두바이. 혹시나 하는 마음은 역시나가 되었고 한 달 후에 문을 연다던 그 슈퍼마켓은 두 달이 지나고 세 달, 네 달, 다섯 달이 지나가도록 간판조차 붙지 않은 채 우리 가족의 가슴을 애태우기만 했다. 참다 참다 가끔씩 관리인을 찾아가 저 슈퍼가 정말로 언제 문을 여는지 물어봤지만 그때마다 “한 달 후.” 또는 “아마도 두 달 후?”와 같은 아무 말 대잔치 같은 이야기만 하길래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말고 궁금해하지 말자며 마인드 컨트롤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언가가 진행되고 있는 건 분명해 보였다. 하루는 간판이 올라가길래 이번에는 정말로 오픈을 하나 설렜지만 그러고 또 한 두 달이 그냥 지나버렸고 어느 날은 내부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서 살짝 들여다보니 상품 진열대를 설치하고 있길래 이번에야말로 기필코라고 생각했으나 역시나 슈퍼마켓은 문을 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마음을 비우자고 다짐했건만 영업을 시작할 듯 시작 안 하는 가게를 바라볼 때마다 내가 내려가서 자원봉사라도 해서 오픈일을 앞당겨주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살다 살다 슈퍼마켓이랑 밀당을 하게 될 줄이야. 그렇게 일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한 달 후에 오픈한다던 슈퍼마켓은 약 일 년 하고도 한 달이 지난 후에야 정말로 손님을 맞이하기 시작했다.
행복은 가까이에
기다림은 고통스러웠지만 그 열매는 달콤했다. 그리고 그 달콤함은 현재진행형이다. 여행이의 방학 첫날 아침, 아이에게 잠시 혼자 있으라 말하곤 나는 그토록 내 애간장을 태웠던 슈퍼마켓에 우유를 사러 다녀왔다. 계단을 이용하면 아파트 건물 밖으로 나가는 문을 열자마자 그 바로 옆에 슈퍼마켓 입구로 들어가는 자동문이 나온다. 벌써부터 40도를 훌쩍 넘기는 무더위 속의 두바이에서 에어컨의 도움 없이 살아남기란 참으로 힘든 일이지만, 아파트 1층에 슈퍼마켓이 자리한 덕분에 우유를 사러 다녀오는 길이 힘들지도 덥지도 않다. 혹시나 빼놓고 안 산 물건이 있어도 금방 다시 다녀와도 되므로 고민 없이 냉장고에서 2L짜리 우유 한 통만 달랑 꺼내 들고 셈을 치른 후 나는 집으로 향했다. 몇 분 전에 밟고 내려온 계단을 거꾸로 오르는데 손에서 시원한 우유통 손잡이가 느껴졌다. 와, 이 시원함, 이 기쁨, 이 행복이라니!조증인가? 내가 지금 왜 이러나 싶으면서도 큰 소리로 하하하! 웃고 싶을 정도로 행복해서 싱글벙글 웃으며 우리 집 현관문을 열었다.
우리는 행복을 찾아서 많은 시간과 큰돈, 에너지를 들이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로 행복은 아주 가까이에, 아주 평범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머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슈퍼마켓 냉장고에서 갓 꺼내온 시원한 우유를 부은 시리얼을 아이와 마주 앉아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었다. 둘 다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눈은 부어 있고 세수는 물론 안 했으며 편한데 후줄근한 옷들을 걸치고는 있었지만 그 아침, 나는 참 행복했다. 미소 띤 엄마의 얼굴을 바라보는 아이의 얼굴에도 웃음이 흐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