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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하는가족 Oct 20. 2020

가을은 선물

속리산 산책길에서


아들: 우리 오늘 여기에서 하룻밤 자고 가는 거 어때?

아빠: 조옿~~지!

엄마: 그럼 일단 호텔에 남은 방 있나 물어보고 올게!




집안에서만 지내기엔 억울할 정도로
맑고 푸르른 가을날이 이어지고 있다.


휴일이었던 한글날을 맞이해 우리 가족은 충청북도 보은으로 당일치기 여행을 다녀왔다. 목적지는 말티재와 정이품송이었다.




말티고개라고도 불리는 말티재는 해발 430m 첩첩산중에 펼쳐진 꼬불꼬불 재미있는 길이다. 충청북도 보은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조선의 일곱 번째 왕, 세조(世祖)가 속리산을 찾았을 당시 가마에서 내려 말로 갈아타고 넘은 고개라 하여 '말티고개'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다.


우리 차에 앞서 말티재를 오르던 자동차는 운전석까지 쫓아가 어디 아프신 거냐고 묻고 싶을 정도로 아주 아주 몹시 대단히 느리고도 또 느리게 고개를 올랐다. 고속도로를 쌩쌩 달려 도착한 곳에서 갑자기 시속 20킬로미터도 안 되는 속도로 움직이려니 속이 터질 것처럼 답답했지만 다음 순간, 앞선 차 운전석에 앉아계신 분께 감사하기로 결심했다.


덕분에 세조가 말 타고 말티재를 오르던 속도로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할 수 있었으니까.





말티재 전망대 근처에 어렵사리 차를 대고 전망대 꼭대기에 올랐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어느새 한 폭의 수묵화와도 같은 풍경이 눈 속으로, 가슴속으로 달려든다.




말티재 전망대에 이어 찾아간 것은 정이품송(正二品松)이었다. 15m에 이르는 키를 자랑하는 이 귀한 소나무의 나이는 무려 600년으로 추정된단다.


아주 오래전, 세조가 속리산 법주사로 향하던 길에 이 나무 밑을 지나면서 자신이 타고 있던 가마가 나뭇가지에 걸릴 것 같다고 염려하자 그 소리를 듣고 스스로 가지를 들어 올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나무는 이로 인해 오늘날의 장관에 해당하는 정이품(정 2품) 벼슬을 하사 받았다.


정이품송은 넓은 잔디밭 가운데 홀로 서있었는데 둘레로는 난간이 쳐있어 갈 수 없는 나라의 국경 너머에 서있는 연인을 간절히 바라보듯 다들 멀찍이 떨어져 눈으로만 이 나무를 훑어보고 있었다.


난간에 붙은 정이품송에 대한 소개와 과거의 모습 사진을 살펴보다 보니 조금 서글픈 느낌이 들기도 했다. 몇 장의 사진으로 남아있는 지금보다 몇십 년쯤 어린 정이품송은 가지도 더 건강하고 잎도 훨씬 풍성해 보였다. 폭설과 병충해 등으로 피해를 입으면서 이제는 한쪽 팔이 반쯤 잘려나간 것처럼 보이는 모습이 되어버린 나무. 사람이 나이가 들면 팔다리 힘이 사라지고 머리숱이 줄어가듯 600살 넘은 할아버지인지 할머니인지, 여하튼 인간사를 기준으로 노인인 이 대단한 나무도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늙어가는구나 싶어 서글픈 마음이 들었나 보다.


우리 부부가 여행이를 낳았듯 정이품송도 후계목 몇 그루를 남겼다 한다. 지금은 제 어미, 아비와 똑 닮은 여행이와 후계목들도 언젠가는 스스로 제 얼굴을 만들어가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인간의 삶도 나무의 삶도
영원할 수는 없지만
어쩌면 우리는 이렇게
영원을 살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애초 계획은 당일치기 여행이었다.


하지만 계획에 변동이 생긴 것은 정이품송 근처에서 여행이가 스카이바이크를 발견하면서부터였다. 저걸 꼭 한 번 타야겠다는 여행이에게 그럼 집에서 보은까지 아주 멀지도 않으니 내일 아침 일찍 다시 한번 오자고 약속을 하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우리는 이틀 연속 보은으로 향하게 된 것이다. 결국은 이틀인 줄 알았는데 삼일이 되었지만.





약속대로 스카이바이크를 타고 나무 향기 싱그러운 솔향공원을 산책했다.




송이버섯이 듬뿍 들어간 전골로 배를 채우고 그럼 이제 무얼 할까 이야기를 나누다가 여기까지 온 김에 법주사에도 다녀오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져 이번엔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는 사찰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맙소사!


법주사에까지 이르는 길가에 먹거리를 파는 노점이 어찌나 많던지! 구운밤과 은행, 옥수수와 국화빵에 보은 지역에서 유명한 대추까지. 두 손 무겁게 이것저것 사들고 입을 부지런히 오물거리던 여행이가 법주사 입구에 있는 호텔을 보자마자 여기에서 하룻밤 자고 가는 게 어떻겠냐고 불쑥 제안했다.


숙박은 계획에 없었기에 우린 갈아입을 옷도 그 무엇도 갖고 있지 않았지만 우리 부부 중 누구도 여행이의 제안에 반대할 생각은 없었고 호텔엔 마침 온돌방이 하나 남아 있다고 했다.





너무 어두워지기 전에 서둘러 집에 돌아가지 않아도 되니 법주사로 향하는 발걸음에 여유가 실릴 수밖에 없었다. 숲 속 산책로를 가다 서다 느리게 걸으며 도착한 법주사는 과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요 국보와 보물을 여럿 간직한 사찰다웠다.





우리 셋은 천천히 경내를 돌아보았다. 가을이 찾아온 법주사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갑자기 어디선가 둥둥둥 북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시계를 보니 저녁 6시. 네 분의 스님께서 차례로 법고(북)를 치기 시작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라진 조용한 경내에 장엄한 북소리가 울려 퍼지고 그 소리는 속리산 이쪽저쪽으로 퍼져나갔다.




가을의 저녁은 6시면 벌써 제법 어둡고 쌀쌀했다. 그러나 몸 좀 덥혀 보자고 감히 손발을 움직이기 미안할 정도로 경건한 소리에 여행이까지 꼼짝 않고 스님들이 만들어내는 북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범종과 운판으로 이어져 목어로 마무리된 가을 저녁의 소리. 그것을 가슴에 품고 속세로 내려온 우리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예상하지 못했기에 더욱 귀한 속리산에서의 시간을 보냈다.




이 가을이 다 가기 전
보은에, 그리고 속리산과 법주사에
다시 한번 다녀오리라 결심하면서.


-2020년 10월, 충청북도 보은-


◇ 여행팁 ◇

● 말티재 전망대
주소: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 속리산로 477
운영시간: 9:00-18:00
입장료: 무료
주차: 말티재 전망대 무료 이용

● 정이품송
주소: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 상판리 17-3번지
도로변에 있으므로 운영시간 제한 없이 무료로 관람 가능

● 솔향공원 스카이바이크
주소: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 갈목리
요금: 스카이바이크 1대당 15,000원
주차: 솔향공원 무료 공용 주차장 이용

● 법주사
주소: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 법주사로 379
전화번호: 043-543-3615(8655) 
입장료: 4,000원(19-65세)/ 2,000원(13-18세, 군인)/ 1,000원(7-12세)/ 7세 미만, 조계종 신도증 보유자 무료
주차: 법주사 내에 주차장이 없으므로 법주사 입주 공용 주차장에 주차 후 이동(주차장에서 법주사까지 도보로 약 15분 소요)
웹페이지: http://www.beopjus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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